"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푸시킨 하면 아스라이 떠오르는 저 시구. 70~80년대에 좌절과 도전의 청춘을 보낸 필자에게 저 문장은 위로의 주문(呪文)이었다. 나만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러시아인들도 잘 모르는, 제목도 없는 푸시킨 시가 어떻게 우리들의 애송시가 되었을까? 한국인의 뿌리 깊은 한(恨) 정서에 어필했다고 생각한다. 안에서 속고 밖에서 속고, 한이 맺힌 우리네 삶. 그저 견디며 뛰고 또 뛰었던 의지의 한국인. 그들에게 노여움이나 슬픔은 유보되어야 했다. 그때 어디서 나왔는지 푸시킨이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온다."라며 용기를 줬던 것.
그런 푸시킨이 자신의 대표작에선 너무 한심한 청년을 내세우고 있어 처음엔 실망스러웠다.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두고 하는 말인데, 주인공 오네긴은 그야말로 '잉여 인간'의 전형이다. 귀족으로 태어나 온갖 교양을 연마한 청년이 사교계나 들락거리며 연애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나중에는 이것마저 권태롭고 허무해 시골로 가 무위의 세월을 보낸다.
이 시골에 소설의 진짜 주인공 타티아나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천하의 플레이보이가 순박한 시골 처녀에게 꼼짝 못 하는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오히려 타티아나가 오네긴에게 빠져 사경을 헤맨다. 상사병에 걸린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장문의 편지를 쓴다. "지금까지 제 인생은 당신을 만나기 위한 저당이었어요." 그러나 오네긴은 시골 처녀의 목숨을 건 순정을 냉소적 허무주의로 희화화한다.
"내 영혼은 사랑도 행복도 모릅니다. 당신의 미덕은 부질없고 우리가 결혼이라도 한다면 고통만 따를 겁니다." 여기에다 큰오빠 같은 훈계까지 덧붙인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그런 미숙함은 불행을 초래할 것이오." 타티아나의 열망은 절망으로 변한다. 게다가 오네긴은 결투로 친구를 죽이고 긴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렇게 8년이 지나고 오네긴은 모스크바의 한 무도회에서 타티아나를 발견한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을 만큼 눈부신 귀부인으로 변신해 있다. "저 여자가 정말 그 촌구석에 있던 그 여자란 말인가?" 여왕 같은 기품과 매력에 모스크바 사교계가 존경을 표한다.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러니까, 실연으로 시들어가던 타티아나는 모스크바의 저명한 공작과 결혼하여 남편의 재력과 명성을 바탕으로 사교계의 여왕으로 성장한 것이다. 오네긴은 뒤늦게 인식한 여자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앞뒤 가리지 않고 미친 듯 구애를 한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반응은 냉담 아니면 무심이다. 오네긴은 밤마다 답 없는 편지를 쓴다. 상사병인데 폐병 걸린 것처럼 수척해져 간다. 그러던 어느 봄날 송장 같은 몸을 이끌고 타티아나를 찾아간다. 놀랍게도 거실에서 자신의 편지를 읽으며 울고 있다. 자신의 발아래 엎드린 오네긴을 향해 공작부인은 담담히 말한다.
"그때 저는 더 젊고 더 예뻤어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러나 당신의 시선과 설교는 차갑기만 했지요. 그런 당신이 왜 이렇게 감정의 노예가 되었나요? 제게 아직 당신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으나 저는 결혼한 몸, 제 운명은 남편에게 성실을 다 하는 겁니다."
타티아나가 등을 돌리는데 밖에는 남편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러시아인들은 고귀한 러시아적 여성을 상찬하는데, 푸시킨은 이야기를 중단하고 나머지는 독자에게 맡긴다. 오네긴의 말로를 희망차게 그리는 독자가 있을까?
여자와 관련하여, 오네긴의 문제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그리고 제때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그는 일찍부터 너무 많은 미인에 둘러싸여 있어 미에 대한 분별이 없었다. 특정한 미인을 얻기 위해 안달하거나 애를 써 본 적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줄을 섰기 때문이다. 미의 잉여 속에 삶의 권태가 싸여갔다. 아예 잉여 인간이 되어버린다. 참된 미를, 혹은 미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푸시킨은 말한다. 봄날의 비는 생명을 불어넣지만 만추의 비는 생명을 단축한다고. 사랑도 아름다움도 타이밍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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