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13)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에…고조선 흔적 지우기
태평환우기, 노룡현 조선성 명시 "고죽성 부근 조선성, 이는 요서성"
송나라때 편찬 역사적 가치 상당
"고죽국 기원은 고조선" 사료에도 조선하→조하, 조선성 없애는 등
中의 발해조선사 은폐 시도 여전

노룡현 서원산에 있는 백이 숙제가 독서하던 곳, 빈터만 남아 있다.
노룡현 서원산에 있는 백이 숙제가 독서하던 곳, 빈터만 남아 있다.

송나라 때 편간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는 노룡현 조항에서 고죽성孤竹城, 요서성遼西城과 함께 조선성朝鮮城을 소개하고 있다.

'태평환우기'에 기록된 순서를 살펴보면 고죽성에 이어서 조선성, 조선성 다음에 요서성이 등장한다. 이는 노룡현의 고죽성 부근에 조선성, 조선성 인근에 요서성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만일 고죽성, 조선성 ,요서성이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이런 순서에 따라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지도, 북경 서쪽에 음산, 고북구 동쪽에 희봉구가 보인다.
중국지도, 북경 서쪽에 음산, 고북구 동쪽에 희봉구가 보인다.

◆하북성 노룡현에는 왜 고죽성, 조선성, 요서성 유적이 나란히 있었는가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멸망시키자 이를 신하가 임금을 죽인 패륜이라 여긴 백이,숙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다가 죽었다.

백이,숙제의 나라가 고죽국인데 그 수도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송나라 때까지 고죽성이 보존되어 있었다.

노룡현에는 현재 고죽국 도성 유적인 고죽성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백이, 숙제 유적들은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노룡현 서원산書院山에는 백이, 숙제와 관련된 비석, 우물, 바위에 새겨진 각자 등의 유적이 남아 있어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필자가 30년 전 방문했을 때 백이, 숙제가 독서하던 곳임을 알리는 "이제독서처夷齊讀書處" 다섯 글자가 또렷이 새겨진 바위가 있어 감회가 깊었다. 다만 동이족의 유적인 탓일까. 성역화가 안 되고 숲속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노룡현에서 동남쪽으로 1,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양산陽山이 있다. 이곳이 고대에는 수양산으로 불렸다. 수양산에 백이, 숙제가 은거했다는 수양산동首陽山洞이 있는데 아마도 백이, 숙제는 여기서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았을 것이다.

◆요서성이 노룡현에 있었던 까닭은?

하북성 노룡현에 왜 요서성이 있었는가. 한국의 반도사학은 요서라고 하면 요녕성 서쪽의 요서를 연상한다. 하지만 한, 당 시대에 현재의 요녕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당연히 요하도 없었다. 한, 당 시대에는 하북성에 요수가 있었고 이를 기준으로 요서, 요동을 나누었다. 이때 노룡현은 요서군에 속했다.

당나라때 요서군 노룡현 부근에 있던 동북변경 노룡새, 지금은 희봉구로 명칭이 바뀌었다.
당나라때 요서군 노룡현 부근에 있던 동북변경 노룡새, 지금은 희봉구로 명칭이 바뀌었다.

명, 청 시대에는 중국과 조선의 국경이 압록강이었지만 당나라 때까지 중국의 동북변경은 노룡현 부근에 있는 노룡새盧龍塞였다. 노룡새에서 당군과 고구려군이 대치하였다.

수, 당과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당나라 변경인 요서의 노룡현 일대에서 수자리를 사는 군졸들이 많았다. 이들은 변경초소에서 장기적으로 복무하며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심지어는 삭막한 전장에서 뼈를 묻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때 많은 백성들은 하루속히 전쟁이 종식되고 가정으로 돌아가 단란한 가정생활을 누리기를 염원했다. 그래서 당나라 시인 가운데는 백성들의 이런 염원을 반영하여 쓴 시가 많다.

영호초令狐楚(766~837)가 쓴 다음의 시도 그중의 하나다.

'규중의 여인이 멀리 있는 남자에게 주다 (閨人贈遠)' "비단 이부자리 속 봄 잠에서 깨어나, 사창을 바라보니 새벽은 희미하다. 덜 깬 몽롱한 꿈속, 아직도 요서 땅을 헤맨다. (綺席春眠覺 纱窓曉望迷 朦朧殘夢裏 猶自在遼西)"

이 시는 요서에 군 복무하러 간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며 꿈속에서나마 만나서 사랑을 나누기를 소망한 당나라 여인의 애절한 심정을 뒤에 시인이 묘사한 것인데, 여기서 말한 요서는 요녕성의 요서가 아니라 노룡새가 있던 당나라 동북변경 요서군 노룡현 일대를 기리킨 것이다.

이광李廣(?~서기전119)은 한 무제 때 노룡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광이 호랑이인 줄 알고 화살을 쏟았는데 그 이튿날 가서 보니 바위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는 '이광사호李廣射虎'라는 고사의 발생지가 이곳 노룡현이다. 노룡현 남쪽에 지금도 그 호랑이를 쏟았다는 유적지가 남아 있다.

당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698~757)은 '변방을 나가며(出塞)'라는 제목으로 쓴 시에 "용성에서 비장군이 지키고 있게 했다면 호족의 말이 음산을 넘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但使龍城飛将在 不教胡馬度陰山)"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한 용성은 노룡성을, 비장군은 이광을 가리킨 것이다.

서한의 저명한 장수인 이광이 노룡현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도 노룡성이 한, 당시대에는 중국의 변방 지역이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송나라 때의 평주 노룡현은 한나라 때는 요서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뒤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당시대에 이르기까지 노룡현은 줄곧 요서군에 속했고 또한 군청, 현청 소재지이기도 하였다. 그런 연유로 노룡현에 요서의 황폐한 성이 송나라 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태편환우기, 1권 첫 머리에 송나라 사람 낙사가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편환우기, 1권 첫 머리에 송나라 사람 낙사가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평환우기'를 통해 밝혀진 조선성

이성계가 한반도에 세운 한양조선은 명, 청시대에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나라의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가 대륙의 발해유역 북경 부근 여기저기서 발견된다는 것은 저들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저들은 그 흔적 지우기에 나서서 북경 북쪽의 조선하를 조하, 조리하로 글자를 변경했고 하북성 노룡현에 고죽성과 나란히 있던 조선성은 쏙 빼놓고 일체의 기록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북경 북쪽의 조선하도 하북성 노룡현의 조선성도 모두 까마득히 잃어버렸다. 이를 인용하여 저서에서 언급한 경우는 한양조선 500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항일전쟁 시기 35년을 거치면서 일본이 날조한 대동강 낙랑설로 인해 반도사관은 고착화되었다.

다행히 '태평환우기'에서 하북도 평주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조선이 건국을 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라는 '두로공신도비문'의 기록에 의해서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본래는 고조선 영토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은 21세기 한국사학이 거둔 세기적인 성과이다.

현재의 진황도시 노룡현은 3,000년 전 주나라 시기엔 고죽국의 영토였고 4,000년 전엔 이곳에서 고조선이 건국되었으며 그 역사의 맥은 위진 남북조시대까지 2,000년을 이어지며 조선현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이것이 송나라 때의 하북도 평주 노룡현,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조선성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노룡현 조선성을 우리에게 알려준 '태평환우기'는 어떤 책인가

'태평환우기'는 송나라 때 낙사樂史(930~1007)가 편찬한 지리 총서로서 모두 200권으로 되어 있다. 낙사는 무주撫州 의황宜黃(지금은 강서성에 속함) 사람으로 처음에는 남당南唐에서 벼슬하였고 송나라에서는 지주知州, 삼관 편수三館編修, 수부 원외랑水部員外郞 등을 역임했다.

송나라 태종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979) 송나라가 북한北漢을 멸망시키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분열 국면을 마무리지었는데 기존에 있던 지리지인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는 그 내용이 너무 간략했고 또 당나라 말엽 오대五代 분열시기에 지명이 바뀐 곳도 많았다.

이에 낙사는 이 책의 편찬에 착수하여 여러 해 동안 노력을 기울인 끝에 완성하였다. 송나라 태종 태평흥국 연간(976~983)에 편간 된 이 책은 현존하는 지리 총서 가운데 비교적 시기가 빠르고 완전한 책으로 평가된다.

이 책의 앞부분 171권은 송나라 초기에 설치된 하남河南 관서關西 하동河東 하북河北 검남서劍南西 검남동劍南東 강남동江南東 강남서江南西 회남淮南 산남서山南西 산남동山南東 농우隴右 영남嶺南 등 13도에 의거하여 각 주州 부府의 연혁, 호구, 풍속, 성씨, 인물, 토산 및 소속 각 현縣의 개황, 산천, 고적, 요새 등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당시에 유주幽州, 운주雲州 등 16주는 비록 송나라의 판도에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아울러 기술함으로써 장차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13도 이외에는 또 '사이四夷'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하여 여기서 주변의 각 민족들에 대해 29권으로 기술했다.

이 책에는 지금은 이미 유실되고 전하지 않는 진귀한 사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한나라에서 송나라까지, 특히 당나라와 오대십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태평환우기' 노룡현 조항의 조선성 기사는 한국 상고사는 물론 동아시아의 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의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필자가 이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30년 전의 일이다. 이제서야 공개한 것은 그동안 자료의 보완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경총요'에서 말한 북경 북쪽의 조선하, 현재의 노룡현 고대의 고죽국지역에서 고조선이 건국했다는 '두로공신도비문'의 내용은 '태평환우기'의 조선성 기록과 함께 발해조선의 역사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자료들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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