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귀가 얕은 잠을 깨운다. 현관문을 열었다. 앞집 열린 현관에 형광조끼를 입은 구급대원 두 명이 들것을 들고 서 있다. 아이를 안고 겁에 질린 엄마의 얼굴은 눈물범벅이다. 어제 늦은 저녁부터 미열이 있는 아기에게 시럽 감기약을 먹여서 재웠다고 한다. 심한 기침과 계속되는 고열에 119를 불렀다며 아기 아빠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부부가 2104호로 이사를 온 지 일 년 반이 넘었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에 선한 인상의 안주인은 두루뭉술한 배를 내밀고 다니며 이사 정리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공주님 백일이라고 백설기를 들고 벨을 누르더니 지난 10월에는 돌떡이라며 핑크색 하트가 고명으로 얹힌 무지개떡이 들어왔다. 이웃에게 백일 떡이나 돌떡을 돌리던 인정도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같은 아파트 같은 승강기 안에서 마주쳐도 인사 한마디 없이 지나치는 요즘 세대에 인사성 있고 상냥해서 볼 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젊은 이웃이다.
집으로 들어와 커튼을 열었다. 창밖은 아직 꺼지지 않은 도시의 불빛으로 희끄무레하고 앞 동 아파트 두 집의 창에서 불이 켜지고 있다. 구급차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때까지 아기가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올려다본 하늘, 요 며칠 미세먼지로 답답하던 하늘에 유난히 밝은 새벽 별이 월드컵대교 교탑 위에서 반짝이고 있다. 선명하게 빛나는 그 별에 고열로 쌕쌕거리던 앞집 아기 얼굴이 겹쳐 보인다. 그리고 문득,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60년도 훨씬 지난 그날, 아무도 모르게 꼭꼭 싸매서 일부러 멀리 두었던 내 열두 살 때의 하루가 눈앞에 와있다. 식은땀으로 등줄기를 깨우던 사춘기의 수많은 밤들, 그 시작의 하루가 오래된 기억을 밀고 나와 나랑 마주쳤다.
봄방학 마지막 날이었다. 엄마는 "밖에 나가면 절대 안 된다."며 신열이 있는 막냇동생을 내 등에 업혀두고 이제 막 파릇해지기 시작하는 보리밭으로 나가셨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농사일과 길쌈과 바느질로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더구나 온종일 동생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모든 방학이 억울하고 싫었다.
우리 동네는 두메산골이다. 집과 가까운 곳에는 논, 밭 몇 다랑이와 집안 울타리 안에 있는 남새밭이 전부였다.
농사철이 되면 부모님은 점심을 싸서 지게에 짊어지고 십리나 떨어진 골내미 논으로 일하러 가셨다. 몇 개의 작은 산을 넘어 시랑골 골짜기에 있는 밭으로 밭농사를 지으러 다니셨다. 모내기를 한다거나 김을 맬 때는 품앗이를 해야 했는데 엄마와 작은 엄마가 점심을 머리에 이고 논으로 갈 때면 나는 막걸리 주전자를 양손에 들고 뒤따라 갔다. 팔이 빠질 것처럼 아파서 몇 번을 쉬어 가야 했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내던지고 소먹이 풀을 베러 나갔다. 어설픈 낫질에 왼손가락을 베어 검지손가락 한쪽 살점이 떨어져 덜렁거렸다. 쏟아지는 피를 쑥으로 누르고 칡잎으로 싸매서 가는 칡넝쿨로 칭칭 동여 맨 적도 있었다. 왼손가락이 아물 때까지 모든 일을 오른손으로 해내려니 불편하고 더디었다. 왼손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때 알았다. 지금까지도 검지와 새끼손가락에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가을이 되면 앞산, 뒷산으로 낙엽을 긁으러 다녔다. 밤나무, 상수리나무, 솔가리… 낙엽이란 낙엽은 갈퀴로 다 긁어모아 한곳에 쌓아두었다. 논에서 오신 아버지가 지게에 싣고 와 부엌에 부려 놓으셨다. 수북하게 쌓인 땔감을 보며 겨울을 날 생각에 어린 마음에도 흐믓했다.
일요일은 엄마를 따라서 보리밭에 나가 풀도 뽑고 겨우내 얼었던 보리밭을 밟아주기도 했다. 고추가 익을 때는 먼 밭까지 고추도 따러 다녔다.
지금 아이들이 들으면 믿지 못할 이야기겠지만 그때 우리 동네 또래 아이들은 집안일을 도우며 그렇게 자랐다.
시골에도 대대로 내려오는 부자가 동네마다 두어 집은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은 일하는 머슴들이 있어서 꼴을 뜯는다던가 나무를 하러 다니지는 않았다.
그날도 아홉 살, 여섯 살, 나를 이겨보겠다고 달려드는 남동생 두 명과 네 살과 돌을 앞둔 여동생까지 내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엄마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답한 방안이 심심해지고 짜증이 났다. 남동생들은 이른 점심을 먹고 밥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궁물'로 내려갔다.
지금쯤 '궁물 공터'에서는 남자애들은 제기차기나 자치기를 할 것이다. 그러다 시들해지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여자애들 쪽으로 가서 잽싸게 고무줄을 끊고 달아날 것이다. 여자애들의 돌팔매질이 비명과 함께 뒤쫓아 갈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한쪽에서는 사방치기나 줄넘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엄마도 막내도 미워졌다. 내 등에서 칭얼거리는 동생 엉덩이에 퍽퍽퍽, 주먹으로 화풀이를 했다. 동생이 더 크게 울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 엉덩이가 요람이나 되는 듯 좌우로 흔들고 위아래로 흔들어 달래 주었다. 그리고는 좁은 방안을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박자에 맞춰 돌다가 "잘 자라 우리아기…" 자장가를 부르다가, 잠깐씩 마루에 나가 쿵쾅거려보다가 어느새 토방까지 내려섰다. 동무들이 어서 와서 같이 놀자고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였다.
나갈까 말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제처럼 조금만 놀다가 엄마가 오기 전에 돌아와 있으면 모르실 걸." 누군가가 내 귀에 소곤거리는 소릴 들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막내가 걱정이 되어서 광목천 검정 책보를 찾아서 슈퍼맨 망토처럼 바람막이로 둘렀다. 네 살짜리 여동생을 앞세우고 여러 번 입단속을 시키며 궁물로 내려갔다.
궁물 공터에는 내 생각대로 동무들이 모여서 한쪽에선 고무줄놀이, 다른 쪽에서는 사방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동생을 업고 할 수 있는 사방치기 쪽으로 얼른 끼어들었다. 칸을 옮길 때마다 동생의 뜨거운 머리가 내 등짝에 부딪히고 잠깐씩 신음 같은 울음이 들리곤 했지만 못 들은 척 귀를 다물었다. 아기를 업고 폴짝폴짝 뛰기가 힘에 부치면 포대기째 동무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얼마나 놀았을까. 등짝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다고 느꼈을 때, 여자애들의 사방치기를 기웃대던 머슴애들이 소리쳤다. "야! 네 동생이 이상해!" 포대기를 돌려 아이를 안았다, 동생의 고개는 아무렇게나 젖혀지고 열에 들떠 허공을 향한 두 눈은 더 이상 칭얼거리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어질어질했다. 다시 막내를 들쳐업었다. 저 멀리 둔덕 넘어 보리밭 고랑에 엎드린 엄마의 등을 향해 내달렸다.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불렀다. 동무 두엇이 뒤따라 뛰었다. 그러나 밤에는 살얼음이었다가 낮에는 녹기를 반복하는 논밭 두둑은 인절미 떡판처럼 질퍽거리고 끈적거렸다. 휘청거리는 나를 미끄러뜨리고 고무신을 붙잡더니 벗겨가곤 하였다.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엄마가 허리를 펴고 우리를 보더니 호미를 내던지고 달려오셨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가 하루에 두세 차례 지나가는 산골마을, 그 버스를 타려면 신작로까지 오리는 걸어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버스비가 아까워 산 넘고 개울 건너 시오리를 걸어 다니는 읍내 초입에 면에서 하나뿐인 의원이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면사무소와 지서, 우체국, 사진관, 짜장면집, 오일장이 서는 시장 통까지… 이 모든 것들이 오직 읍내에만 있었다.
엄마가 논두렁에서 동생을 받아 안았다. 흙 범벅이 된 바지와 고무신, 등짝에는 동생이 흘린 콧물과 눈물이 번들거렸다. 엄마는 말미 재를 넘어 지름길로 가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오라고, 해찰하지 말고 뛰어가라고, 이미 뛰기 시작한 내 뒤통수에 대고 고함치셨다.
평소라면 오금이 저려서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말미재고개로 들어섰다. 그 길은 온갖 흉흉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길이다. 문둥이가 보리밭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아이를 잡아먹었다던가, 누구는 간첩에게 붙들려 북한으로 끌려갔다던가, 양손에 목발을 짚은 군복 입은 남자가 학교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갈고리 손으로 도시락을 빼앗아 갔다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말미재 고개에 숨어 있었다. 언젠가 머리를 산발하고 누더기를 여러 겹 걸쳐 입은 실성한 여자가 고개를 넘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 달아난 적도 있었다.
오르막은 인가와 가깝고 작달막한 소나무들이 햇빛을 나눠주고 있어서 밝고 따스했다. 기어서 고갯마루까지 올라와서 숨을 한번 크게 쉬고 골짜기로 내려섰다. 인적 없는 내리막길은 대낮에도 어두웠다. 어지간히 바쁜 일이 아니면 어른들도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급하게 구불거리는 어렴풋한 길의 흔적을 따라 내려가다가 쭈욱 미끄러져 대여섯 걸음 앞에서 멈추기도 하였다. 빈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스쳐 부스럭대는 소리가 도깨비들 방망이 휘두르는 소리로 들렸다. 머리털이 솟구치고 오그라드는 몸으로 가뿐 숨소리도 토해내지 않으려고 입을 앙다물었다.
산 아래 대여섯 채의 초가집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동아실을 지나며 안도의 숨을 쉬는 것도 잠깐이었다. 작년 장마 때 오솔길까지 불어난 황톳물에 발을 헛디딘 사내아이가 끝내 나오지 못했던 둠벙을 만났다. 아이의 혼을 건진다고 징과 꽹과리를 치며 굿을 하던 무당을 보았던 곳이다. 시커먼 속내를 알 수 없는 그곳, 더 빨리 지나가고 싶었지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개울을 건너자 원산과 안밤실로 연결되는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두 갈래 길이 나오고 저만치 신작로가 보였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밑동이 텅 비어있는 아름드리 미루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옆집 대학생 삼촌을 따라가서 배웠던 예수님이 떠올랐다. "막내를 낫게만 해 주시면 예수님을 잘 믿을 게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후회가 밀려오고 눈물과 함께 동생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바짓가랑이에 붙은 황토가 그 상황에서도 눈에 거슬렸다. 나뭇등걸에 문질러보다가 손바닥으로 대충 털어내고 일어섰다.
봄방학이라 그런지 오가는 학생들도 없었다. 오일장이 서기 이틀 전이었다. 읍내로 향하는 신작로는 봄 가뭄에 목마른 흙과 자갈들이 한가했다. 하늘과 맞닿은 미루나무 가로수만이 이따금 공중에서 바람과 내통하는 소리를 낼뿐, 무서우리만치 적막했다. 갑자기 빵빵빵 경적이 따발총 소리처럼 울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비스듬한 신작로 갓길로 미끄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산 같은 흙먼지를 내 눈앞에 부려놓고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먼지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십리도 못가서 빵꾸나 나버려라." 흙먼지만 보이는 트럭 뒤꽁무니에 대고 발길질을 하고 고함을 질렀다. 답답하던 속이 조금 뚫리는 듯 했다. 안 그래도 목이 말라 뻑뻑하던 입안에 매캐한 흙먼지가 가득 들어와 마른침을 짜내서 뱉어야 했다. 이번에는 신작로의 크고 작은 돌부리가 나를 두어 번 더 넘어뜨렸다.
홍역이 유행하던 그때, 의사 선생님은 자리에 없었다. 원장 부인이면서 간호사인 주인아줌마가 의원을 지키고 있었다. 내 몰골을 본 그녀는 쯧쯧쯧 혀를 차더니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작은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 흙먼지와 눈물로 얼룩진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 따뜻해서 뭉클했다. 서러움이 올라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간호사 아줌마가 내 엄마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붕붕 떠다니기도 하였다. 그녀는 다정한 목소리로 "선생님이 왕진에서 돌아오면 갈 것이니 어서 가서 약을 먹여라. 약을 먹으면 동생은 괜찮을 거다." 하며 약봉지를 내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집을 향해 다시 달렸다. 의원에 갈 때는 생각나지 않던 다른 걱정이 뜀박질을 멈추게 했다. 동생을 데리고 밖에 나갔다고 아버지께 혼날 일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집에 안 들어가고 고모네 집으로 갈까, 외갓집으로 갈까. 저 시커먼 둠덩 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퍼뜩, 약을 빨리 먹이면 동생이 괜찮을 거라던 간호사 아줌마의 말이 떠올랐다. "일단 약봉지는 갖다 주어야지."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바지 옆구리에 문지르고 약봉지 쥔 손을 가슴에 품고 말미재로 들어섰다.
내려올 때의 말미재 길과 올라갈 때의 말미재 길은 전혀 달랐다. 내려올 때는 뛰어내려오다 넘어지면 뒹굴면서 저 만치 갈 길이 줄어들곤 했었는데 올라갈 때는 기다시피 가야 할 곳이 많았다. 무섭고 지루하고 숨이 막혔다.
사립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집안을 살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서 더 무서웠다. 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집안 분위기를 눈치 챈 개구쟁이들은 윗방에 들어가 시키지 않아도 숙제를 해두고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침 일찍 거름을 지고 골내미 논에 가셨던 아버지는 쇠죽을 끓이시는지 사랑방 아궁이 앞에 앉아계셨다. 소나무 장작 타는 소리에 내 발소리를 듣지 못하셨을까. 기다리던 엄마가 기척을 알아채고 사랑방에서 문을 열었다. 재빨리 약봉지를 툇마루에 던졌다. "아기 약 먹이게 물 떠와라" 하시며 나를 부르는 엄마를 무시하고 사립문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쫓아 나왔다. 그러나 다람쥐처럼 재빠른 나를 아버지는 붙들지 못했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일부러 나를 잡지 않으신 게 분명했다.
집을 나와 뒷산으로 갔다. 마을 어귀에서 우리 집 쪽으로 올라오는 길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상수리나무 낙엽을 깔고 앉았다. 의사가 빨리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그러고 보니 동생들 이른 점심 먹일 때 남긴 밥을 먹은 게 전부였다. 내 사정도 모르고 밥 달라고 졸라대는 배를 깍지 낀 손으로 꾹 눌러 등허리에 붙이고 문질러 주었다.
저 아랫마을 어귀에 작은 오토바이가 보였다. 나도 산에서 내려와 집 앞에서 의사를 기다렸다. 땅거미와 함께 의사의 왕진가방이 사랑채에 도착했다. 의사 뒤를 따라가 문지방 뒤에 몸을 반쯤 숨기고 한쪽 눈으로 들여다본 방안,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나방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막내를 보았다. 이슬 같은 숨조차 붙들고 있기에 지쳤는지 미동도 없었다. 차디찬 의사의 주삿바늘에 막내의 몸에서 마른 울음이 잠깐 묻어 나온 듯 했다.
의사보다 앞서 토방을 내려온 나는 뒤란 장독대 뒤에 숨었다. 삼월의 초저녁 찬 기운이 으슬으슬 얇은 옷을 파고들었다. 쪼그리고 앉은 다리에 쥐가 나고 온몸이 얼어버릴 것 같아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뒤란에서 통하는 뒷문을 열고 윗방으로 들어가야지, 마음을 먹고 일어서려는데 사랑채에서 엄마가 "아가아가아가" 울부짖었다. 그렇게 다급하고도 괴상한 울음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들었고 지금까지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다시 털썩 주저앉았는데 그때까지 주체할 수 없던 떨림과 눈물이 거짓말처럼 딱 멈추었다.
아버지가 꺼억꺼억 짐승처럼 우셨다. 그 소리에 사랑채가 쩍쩍 금이 가는 것 같았다. 저러다가 아버지가 숨이 끊어지면 어떡하지? 순간 무서움이 몰려왔다. 나도 사랑채로 들어가 막내의 이름을 부르며 울기라도 해야 하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더욱이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배가 고파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부엌으로 내려가 부뚜막에 앉았다. 엄마가 가마솥에 묻어둔 밥그릇을 꺼내 반찬도 없이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밥을 먹고 나니 아버지한테 붙잡혀서 두들겨 맞는다 해도 이제는 하나도 겁나지 않겠다는 어깃장이 생기기도 하였다. 부뚜막은 뜨뜻하였고 얼었던 몸이 풀리고 배도 불렀다. 졸음이 쏟아졌다.
동생들은 윗방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었다. 눈치 없이 내 눈도 자꾸 감겼다. 그러나 잠들면 막내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앉은 채로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바깥에서 들리는 엄마의 애끓는 흐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며시 문을 열어보았다. 아슴하게 겨우 사립문이 보이는 것이 이른 새벽이었다. 아버지가 사랑채 토방에 발채가 얹어진 지게에 삽자루를 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랑방으로 들어가더니 가마니에 말아서 새끼줄로 동여맨 무언가를 가지고 나와서 발채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마루 끝에 서서 울기만 하셨다. 지게를 짊어진 아버지가 잰걸음으로 사립문을 나가고 그 뒤를 엄마의 맨발이 쫓아가다가 문턱에 걸려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집 앞 다랑논을 뛰다시피 가로질러 아랫물로 내려가셨다. 아버지의 흰 저고리가 희끗희끗 보이다가 마을 어귀 모퉁이를 돌아가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래 오래 울었다.
날이 밝고 한참 후에 아버지와 빈 지게와 삽자루가 돌아왔다. 크고 나서 알았지만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속 깊은 골짜기에 애장터가 있다고 했다.
봄 방학이 끝나고 개학 첫날, 나는 초죽음이 되어있는 엄마를 대신해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지었다. 동생들에게 밥을 먹이고 설거지를 끝내고 남동생과 시오리를 걸어서 학교에 갔다.
홍역바이러스는 감염성이 강해서 면역이 약한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퍼지는 병원체이다. 이웃 동네에서 한 사람이라도 감염되면 거의 모든 동네에 집단 전염되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빠르게 전염되었는데 어린아이들의 사망률이 높은 소아전염병으로 악명이 높았다. 백신도 없어서 예방주사도 맞을 수 없던 때, 역사상 다른 어떤 질병보다도 많은 아이들이 홍역에 희생되었다.
그해, 우리 마을에서도 몇몇 집의 아버지들이 자식을 가마니에 싸서 지게에 짊어지고 마을 어귀 모퉁이를 돌아서 골내미 깊은 골짜기로 갔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들이 만든 돌무덤에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세우고 돌아섰다고 했다. 그곳을 엄마들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가족 누구에게도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를 몰아세우곤 하셨다. 일하고 돌아와서는 경란이 있는 곳을 대라며 울며 애원하다가 사립문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디쯤을 헤매이다 돌아오시는지 땅으로 꺼져 내릴 것 같은 모습에 어린 마음에도 겁이 나고 죄책감이 밀려와 뒤란으로 피하기 일쑤였다. 자주 장독대에 쪼그려 앉아 울었다.
평생 그 길을 오가며 논농사를 지으러 다니시던 아버지, 그쪽 논에 다녀오는 날이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돌아오셨다. 그리고는 꺼억꺼억 울다가 토방이건 마루건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드시곤 하셨다. 그 속내를 짐작도 못하는 나는 술꾼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미워했었다.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나는 사랑채에 시선을 두지 못하였다. 이상하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뭔지 모를 서늘함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솟구치는 무섬증이 왔다.
잠을 자려고 누워 눈을 감으면 내 등에 업힌 채로 열에 들떠 허공에 멈춰 있던 막내 경란이의 두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가위에 눌려 몇 번을 잠에서 깨고 나면 식은땀이 온몸에 흥건하였다.
작은엄마는 죽은 동생이 나와 정을 떼려고 무섬증을 주는 것이라고, 맘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나는 집에서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도 엄마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을 내거나 때리지도 않았다. 왜 말을 듣지 않았느냐고 크게 화라도 내면서 종아리를 때려줬으면 좋겠는데, 엄마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히고 실컷 욕을 먹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부모님은 날이 밝으면 넋이 나간 모습으로 논밭으로 나가시는 것이었다.
예닐곱 살 때 저녁 반주로 막걸리 한 사발을 드신 아버지가 "너를 어우리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셨다. 가슴이 철렁해서 대성통곡한 적이 있었다. 곧바로 엄마가 배꼽을 잡고 웃으시며 "아버지가 장난치시는 거야." 라고 해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나는 주워온 아이가 틀림없을 것 같은 의구심이 그즈음에 들기 시작하였다.
정작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은 것은 내 인생의 첫 가출 사건 때였다. 숨 막히는 집이 싫었다. 어느 토요일, 단짝 친구 성순이가 자기 집에 가자고 했다. 앞뒤 안 가리고 학교가 파하자 친구를 따라 나섰다.
읍내 장터를 벗어나서 시냇물을 건너 첫 동네에 성순이네 집이 있었다. 비가 많이 내려서 홍수라도 날 때는 그 쪽 동네 아이들은 모두 결석을 하기도 하는 동네였다. 크고 작은 돌들로 아이들 보폭에 마침맞게 놓은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뛰어서 건너갔다.
아직 시냇물에 발 담그기에는 물이 차가웠다. 나는 돌멩이를 주워서 앞서서 팔짝 뛰고 있는 성순이 발밑에 던졌다. 물방울이 튀었고 깜짝 놀란 성순이가 "야 이 가시내야!" 하며 물속에서 돌멩이를 건져서 내 발밑으로 던졌다. 그날 오후 내내 시냇가에서 놀다가 노을이 암수산 산허리에 내려앉을 때까지 배가 아프게 웃고 엉뚱한 일에 한눈을 팔다가 성순이네 대문으로 들어섰다.
딸의 친구가 왔다고 모두 반겨주셨다. 계란찜에 간고등어 감자조림이 그날 먹은 잊히지 않는 반찬이다. 우리 집에서는 보리가 더 많은 거무스름한 밥을 먹었다. 보리와 쌀이 반반 섞인 흰색에 가까운 저녁밥을 먹었다. 모란꽃이 만발한 둥근 양은 밥상에 갖가지 반찬이 있었다. 밥을 먹고 나니 우리 집에서는 명절 때나 먹는 오꼬시를 주전부리로 내주시기도 하셨다.
어찌나 쩝쩝거리며 맛나게 먹었는지 "밥을 복스럽게 먹는 걸 보니 시집가서 잘 살겠구나" 성순이 할머니가 덕담을 하셨다. 아무튼 '복' 이라는 말에 신이 나 더 맛있게 먹었다.
외갓집이나 고모네 집밥은 먹어봤지만 진짜 손님 대접을 받은 것은 난생처음이어서 꿀맛이었다. 챙겨야 할 동생들도 없고 밥 먹고 설거지 안 해도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친구하고 밥 먹고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만 하고 있어도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곶감을 내다 주시는 성순이 할머니, 그 집이 눈물이 나도록 부러웠다.
성순이네 동네에 사는 성옥이는 성순이 사촌이고 같은 반이었다. 우리 셋은 같이 밥을 먹고 등잔불 아래서 실뜨기놀이나 그림자놀이를 했다. 밤늦도록 까르륵거리며 뒹굴다가 한방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토방에서 공기놀이를 하는데 "숙제하고 놀아야지." 성순이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우리를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 순간 우리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떠오르고 성순이가 정말 부러웠다. 방으로 들어 간 우리 셋은 뜨듯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숙제를 했다.
점심때가 되자 성옥이네 오빠가 데리러 왔다. 그 오빠는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코 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나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우리는 그 오빠가 꿩을 잡으러 간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양지바른 산 밑에는 우리 동네 보리밭보다 훨씬 푸르고 넓은 밀밭이 있었다. 산에서 꿩이 내려와서 밀 싹을 뜯어 먹고 땅에 심은 콩도 빼 먹는다고 했다. 전날에 뿌려놓은 약 묻은 콩을 먹고 죽은 꿩을 주우러 산 밑으로 갔다. 꿩이 그렇게 예쁜 깃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버지께서도 가끔 죽은 꿩을 주워 오셨는데 그때는 그냥 새 같았다. "왜 꿩은 바보같이 약 묻은 콩을 먹고 죽는대요?" 내가 물었더니 "꿩이 얼마나 콩을 좋아하면 비둘기는 콩밭에만 정신이 있다는 속담까지 생겼겠냐" 며 먹을 것에만 온 정신을 쏟는 사람을 빗대서 하는 말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그 밤에도 우리는 밥도 셋이 같이 먹고 같이 놀고 잠도 같이 잤다. 그때부터 우리 셋은 오랫동안 단짝이 되었다.
웅덩이 보다 조금 큰 방죽에서 줄줄줄 새고 있는 개울물 말고는 우리 동네에는 헤엄칠만한 곳이 없었다. 시냇가에 나가려면 오리를 걸어 나가야했다. 나는 개헤엄도 칠 줄 몰랐지만 성순이는 헤엄치기 선수였다. 놀 거리가 많은 성순이네 집에 여름철에는 더 자주 갔다.
어느 여름날, 양재기 하나씩을 들고 다슬기 잡으러 가는 성순이 엄마를 따라 나섰다. 깊은 곳은 위험하다고 수초와 자갈들이 엉켜 있는 가장자리에서 놀라고 당부하셨다. 수초와 돌멩이를 이리 저리 헤치고 놀면서 넘어지면 일어서다 미끄덩,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손 짚고 발차기 하며 허우적대다가 개구리 헤엄을 저절로 습득하게 되었다.
맑고 잔잔한 물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내려다 본 물밑세계는 평화로웠다. 수초를 한번 치고 나온 물이 자갈들과 포옹을 하는 소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른이 되면서 여러 장르의 수많은 음악들을 들어 보았지만 그 어린 날에 들었던 물속의 하모니와 비슷하기라도 하였던 음악은 하나도 없었다.
성순이네 동네 엄마들은 밭에 나가 일하기 무더운 점심 직후를 이용해서 다슬기를 잡으러 시냇가로 나가곤 하였다. 몇 집에서는 다슬기를 잡아 오일장에 내다 팔았는데 간이 안 좋은 사람한테 좋은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때는 다슬기도 참 많았다. 물속을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잔잔한 물결 아래로 돌멩이가 까맣게 보일 정도로 크고 작은 다슬기가 붙어있었다. 씨알 굵은 다슬기만 줍다시피 떼어내도 금세 양재기를 채우곤 하였다. 다슬기로 가득한 큰 다라이를 어른들이 나눠 이고 돌아왔다.
성순이 엄마가 깨끗이 씻은 다슬기를 삶는 동안 성순이 아버지는 대문 옆 감나무 그늘에 멍석을 펴주셨다. 된장맛과 부추향이 밴 우렁이를 탱자나무 가시와 함께 내다 주시고 어른들은 무논으로 피사리 하신다고 나가셨다.
탱자나무 가시를 우렁이 윗부분에 살짝 찔러 넣고 살살 돌리면 윗쪽은 검고 내려갈수록 옥색인 빛깔, 얼마나 투명한지 내장까지 다 보였다. 짭조름 하고 쓰기도 한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려서는 위쪽만 먹었다. 내장에 똥이 있다고 생각했고 모래를 씹는 것처럼 지금거리는 게 싫었다.
그 맛에 푹 빠진 나는 후에 엄마를 졸라서 작은엄마와 사촌들과 함께 가끔 다슬기 잡으러 오리 길을 나서곤 하였다. 우렁이 줍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시원한 냇가에서 한나절 노는 것이 더없이 즐겁고 행복하였다.
해가 다 저물도록 집에 안 들어오는 딸을 찾아 나선 엄마는 아랫물, 궁물, 윗물까지 내 또래 아이들을 찾아가 나를 물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것이 우리 동네에 같은 반도 세 명이나 있었는데 나는 동네 아이들과는 친하지 않았다. 같은 동네라고는 하지만 깊은 삼태기 같은 동네여서 집들이 띄엄띄엄 있어 사이가 가깝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윗물 끄트머리에 사는 경숙이 한테서 내가 성순이랑 같이 가는 것을 보았다는 소릴 듣고 그나마 안도했다고 했다. 지금처럼 집 전화나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볼 방법이 없었으니 부모님은 얼마나 불안하고 애가 타셨을까.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는 동안 동생들과 힘드실 엄마 생각, 무서운 아버지 얼굴이 문득문득 떠오르긴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월요일에 학교로 갔다가 수업이 끝나고서야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집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시며 퍼런 멍이 들도록 싸리나무 회초리로 종아리를 치셨다. 그리고 또 우셨다. 사람도 소처럼 운다는 것을 나는 열두 살 때 처음 알았다.
나는 점점 집이 싫어졌다. 읍내에 사는 친구들과 모든 것을 비교하며 가난하고 촌스러운 아버지가 엄마가 싫었다. 광목천에 검정 물을 들여서 엄마가 만들어 주는 옷, 삐끗하면 바가지머리가 되기도 하는 단발머리, 바느질 가위로 엄마가 잘라주는 머리에 늘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있었다. 자기 집에 나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이 마을 저 마을, 자기네 집에 같이 가자고 하면 얼른 따라나섰다. 토요일 오후에 친구 집에 가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놀다가 월요일에 학교로 가는 일이 자주 반복되었다.
주로 성순이를 따라 냇물을 건너갔다. 그해 초여름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려서 냇물이 불어났다. 어쩔 수 없이 이틀을 성순이네와 성옥이네를 오갔는데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은 화정리 선희네 집에 갔다. 선희네 집은 오리쯤 걸어 나와서 버스 정류장이 있는 동네에 있었다. 선희는 언니가 둘이 있는데 시집 갈 나이가 가까운 처녀들이었다. 마침 그 동네에 동춘 서커스단이 들어왔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언니들하고 구경을 나갔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집채 보다 더 큰 천막을 쳤는데 '굳세어라 금순아' 유행가가 스피커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같으면 다 큰 처녀가 밤에 서커스 보러 간다면 절대 허락 하지 안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미운 이유를 한 가지 더 만들었다. 선희와 나는 입장표를 내고 정문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무대 뒤쪽 천막을 살짝 들추고 살금살금 기어서 들어갔다. 언니들이 망을 봐 주었지만 들킬 것 같아 방망이질 치던 가슴이 끝날 때까지 진정되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 집에 초대 받지 못한 주말에는 외갓집으로, 고모네 집으로 갔다. 점점 겁이 없어지고 주중에도 집에 안 들어가는 날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물어물어 찾으러 다니던 엄마는 더 이상 나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 아버지도 회초리 드는 것을 포기하셨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나의 친척 집, 친구 집 순례와 방황은 다음 해 12월에 끝이 났다. 기적처럼, 선물처럼 늦둥이 동생으로 사내아기가 태어났다. 열두 달을 내 동생으로 살다가 내 잘못으로 하늘나라에 간 여동생의 환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를 잘 돌보는 일이 먼저 간 동생에게 용서받는 일일 거라고 내 맘대로 생각했다. 엄마처럼 애정을 쏟다가도 문득문득 떠난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의 소울음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고 엄마 아버지에 대한 미운 마음도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죽은 동생은 벌써 잊어버리고 새로 태어난 아기를 무척 예뻐하는 엄마 아버지가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였다.
막내 남동생의 옹알이가 시작될 무렵 봉실 산 하늘에 퍼지는 붉은 노을이 너무 예뻐서 한 번씩 고개 돌려 바라보며 저녁 밥솥에 불을 때고 있었다. 아궁이에 탁탁 타다닥 탁, 부지깽이 장단을 맞춰가며 마른 솔잎을 넣고 있는데 아버지의 헛기침이 내 옆에 앉으셨다. 내 이름을 촉촉한 목소리로 부르셨다. 자주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부지깽이 잡은 손이 흔들렸다. 아버지는 솔잎 한 줌을 집어 아궁이에 던져 넣으며 말씀하셨다. "경란이가 죽은 것은 네 잘못이 아니다." 퉁명하고 어색하게 더듬거리기까지 하면서 한마디 하시더니 얼른 일어나 정지 문을 나가셨다. 아궁이 불 때문인지 아버지 말씀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얼굴이 뜨겁게 화끈거렸다.
"왜 이제야 말하는데요? 진작에 말해주지 않고요. 그 한마디 하는데 오래도 걸리셨네요." 아버지 뒤에다 대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가슴 쪽에서 올라오다가 목구멍으로 꿀꺽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별다른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나 때문에 경란이가 그렇게 됐다고 말하는 식구들은 없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성격이 변해갔다. 여자애였지만 대여섯 명의 사내애들을 쥐락펴락하는 윗물 대장이었다. 아랫물과 윗물아이들이 전쟁놀이나 내기 같은 것을 벌일 때는 앞에서 윗물 부대를 지휘할 정도로 겁 없는 머슴애 같던 나였다.
막내 경란이가 그렇게 된 후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고 다녔다. 저만치 길가에 어른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이면 얼른 다른 길로 돌아서 지나가곤 하였다. 말수도 줄었다. 그날 이후로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로 사춘기를 보내면서 조용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경란이 사건을 겪으며 아버지와 마음이 더 멀어졌다. 가난해서 싫었고 완고해서 싫었다. 아들만 자식이고 딸은 출가외인이라고 상급학교도 가지 말라는 아버지가 너무 미웠다. 커서도 진정으로 잘 해드리지 않았다. 자식의 도리를 했을 뿐이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 앞에서는 숨이 막혔다.
경란이가 죽었을 때 아버지의 소울음소리가 어제 일처럼 귀에 쟁쟁하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슬처럼 여리었던 것을 오늘에야 깨닫는다. 그렇게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완고하지 않았다면 그 보릿고개를 어찌 넘겼으며 5대 종손 7남매 장남의 역할을 어찌 해내셨을까… 당신 자식 5남매는 또 어찌 키웠겠는가… 나는 절대 하지 못했을 아버지 일흔 셋의 삶이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진다.
사춘기의 방황을 끝내게 해준 보물, 막내 남동생은 어느덧 듬성듬성 흰머리가 보이는 육십을 코앞에 둔 중년이 되었다. 그 중년 남자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안부 전화를 걸어온다. 부모님이 안 계신 지금, 누나와 매형이 부모님 대신이라고 나름 신경을 많이 써 준다. 무슨 무슨 날이라고 이름 붙은 날에는 용돈이 입금되고 건강보조식품은 택배로 도착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맛집을 찾아내서 우리 부부를 불러내곤 했었다. 근래 몇 년은 현대의 역병인 코로나19를 조심하라고 애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지게 하기도 한다. 우리 남매는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며 같이 늙어가는 중이다.
오늘 비로소 귀엽고 영특했던 동생을 떠올려보니 웃을 때 볼우물이 깊던 아이였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를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하다가 뭉텅뭉텅 입 밖으로 내놓던 아이였다. 뒤뚱뒤뚱 걸음마를 시작하던 아이였다. 아버지와 엄마의 미소였고 행복이었다. 사진 한 장 가진 게 없지만 머릿속에, 가슴속에 콕 박혀있는 영원한 돌쟁이, 내 동생이었다.
이제 떠난 동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고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이제부터는 그리운 추억으로 가끔씩 꺼내 보아도 될 것만 같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정리를 해야 한다고들 한다. 버리기를 잘 해야 한다고 노인 전문가들이 여기저기에서 말한다. 사진첩부터 정리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떠 올리기 싫어 오래된 사진들부터 정리했다. 결혼 전 사진은 한 장도 남지 않았다. 친정 부모님 사진도 없다. 사진 한 장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니 아버지가 더욱 그립다. 인정머리 없는 내가 미워진다.
저 멀리 당인리 발전소 굴뚝에서 퐁퐁퐁 수증기가 솟아나온다. 얼마쯤 둥근 기둥으로 올라가다가 흩어져 갖가지 구름 모양이 되어 구름과 섞인다. 수증기를 들추고 붉은 아침 해가 나오기 시작한다. 새벽별은 어느 틈에 쉬러 들어가고, 거기쯤에서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다. 황금색 주름사이에 은가루 같은 봄기운이 가득 물려있다.
퇴근하면서 혹시나 하고 앞집의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딩동, 딩동 벨이 두세 번 울리고 덜컥 문이 열린다. 푸석한 얼굴에 충혈된 눈으로 아기 아빠가 나온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차! 실수했구나.' 싶었다. 온종일 아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다가 집에 와서 좀 쉬려는데 내가 주책없이 방해를 한 것이었다. "미안해요. 아기가 너무 걱정돼서요." 했더니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기는 넘겼어요. 조심조심 살았는데 어디서 감염되었는지 모르겠어요." 한다. 그나마 빨리 병원에 간 거며 수속하는 과정이 순조로워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나른한 눈으로 웃는다.
한 달 동안의 병원 생활을 끝내고 앞집 아기가 퇴원을 했다. 나는 핑크와 파랑의 체리가 앙증맞은 아기용 마스크 박스를 퇴원 선물로 건네주었다. "예전보다 볼살은 빠지고 떼는 늘었지만 키는 조금 더 자란 것 같아요." 아기 엄마가 선하디선한 눈으로 크게 웃는다. 마스크 안에서도 활짝 드러낸 하얀 이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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