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유학하던 때, 밤마다 천에다가 내 자화상을 수놓았어요. 출산과 육아로 인해 유화로 작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요. 어느 날은 자화상 마지막에 눈동자를 수놓고 실을 끊으려 쭉 당기는데, 실이 마치 흐르는 눈물처럼 보였어요. 절정의 감정이 함축된, 내 생의 희노애락이 담긴 듯한 그 눈물을 보자마자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쭈뼛거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말 작업하면서 그런 건 처음이었어요."
서옥순(59) 작가는 물감과 붓 대신 실과 바늘을 재료로 작업한다. 대학 다닐 땐 자유롭게 유화 작업을 펼쳤지만 남편과 함께 유학을 떠난 이후 작업 방식에 대한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계속 '나'를 돌아보며 생각한 끝에는 그가 어린 시절 바라본 할머니의 손이 있었다.
그는 "별다른 놀잇거리가 없던 그 때, 호롱불 밑에서 색동천으로 예쁘게 복주머니를 만들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수를 놓아 작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며 "특히 바느질은 당시 육아를 해야했던 생활 여건 속에 내가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아이를 재워놓고 밤마다 실로 자화상 등을 드로잉하길 반복했다"고 말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된 작업이었지만, 바느질은 그에게 자유이자 치유의 수단이 됐다.
"한땀 한땀, 작업을 하는 동안만큼은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 현재의 어려움들을 잊고 몰입할 수 있었어요. 손은 아프지만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죠."
실제로도 실은 상처를 꿰매거나 사물을 연결하는 매체다. 작가는 봉합, 치유의 의미를 담은 실이 굉장히 흥미 있고 매력적인 재료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붙이고, 잇는다는 것에서 실과 의미적으로 비슷한 테이프를 이용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마치 실타래에서 풀려나온 듯 테이프를 붙이고 물감을 칠한 뒤 떼어내는 작업을 여러겹 반복한다.
테이프 작업은 이전 작업에 비해 비교적 컬러풀하다. 개인의 서사에 집중하던 그의 작업이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얘기를 담고자 하며 나타난 변화다.
그는 "캔버스에 까만 실로 드로잉할 때만 해도 개인적인 아픔을 얘기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던 코로나를 겪으면서 개인적인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사회적으로 더 크고 중요한 일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좀 더 시야를 넓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내 인생도 그렇고 누구든 고비마다 매듭을 지으면서 삶을 이어나가는 것 같다. 풀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매듭 지으며 살아가는구나 싶다. 앞으로도 그런 주제를 갖고 작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만의 예술 언어를 찾고자 하는 창작의 고민을 늘 갖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것이 찾아지면 다행이죠. 어쨌든 그 과정이 참 즐겁게 느껴져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이니 일단 지금의 작업에 집중해야겠죠. 어떤 흔들림이 있더라도 지평선 저 끝을 쳐다보며 뚜벅뚜벅 걸어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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