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바흐의 궁핍

금동엽 문화경영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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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자신이 활동했던 시대에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음악가로서 오늘날로 치면 팝스타와 같은 존재였다. 요즘 같았으면 엄청난 저작권 수입을 올렸겠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장학금을 받아 겨우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그는 22세 때 먼 친척이었던 마리아 바바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13년 만에 끝나게 되는데, 그가 연주 여행을 하던 중 첫 부인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다음 해인 1721년에 그는 소프라노 가수였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했으며, 이렇게 두 번의 결혼을 통해 20명이나 되는 자녀의 아버지가 됐다. 그 중 10명(어떤 기록에 의하면 12명)이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고 하니 아무리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였다 하더라도 바흐는 풍상의 삶을 살았던 게 틀림없다. 이를 두고 외국의 한 대학에서 음악사를 강의하던 한 교수가 답을 '빚더미'로 정하고 "바흐에게는 20명의 자녀가 있어서 그는 평생을 ( ) 속에서 보냈다"라는 문제를 냈는데, 많은 학생이 '침대'를 답으로 적어 냈다고 하는 우스갯소리를 읽은 적이 있다.

과연 바흐가 궁핍한 삶을 살았는가? 몇몇 기록은 그가 부자는 아니었으나 빈곤 상태에도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바흐는 은광 산업과 관련한 주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이런 사실이 그가 부자였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라이프치히에서의 그의 생활은 높은 물가로 인해 힘들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는 1730년에 그가 절친이었던 에르드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가장 존경하는 선생이시여, (중략) 신의 뜻에 따라, 여기서 나는 여전히 나의 직무를 다하고 있소. 하지만 이 자리가 내가 들었던 만큼의 돈벌이가 되지 않고, 사무실에서 발생하는 다른 추가 수입이 전혀 없으며, 이곳의 물가는 너무 비싸고, 당국자는 이상하리만큼 음악에 관심이 없어서 소생은 계속되는 짜증과 시기, 그리고 박해 속에서 살아야만 했소이다. 따라서 거듭 말하는 것 같지만 신의 도움을 받아 어디든 간에 다른 곳에서 내 밥벌이를 찾아야만 하겠소. 혹 선생이 있는 도시에 늙고 신실한 종에게 맞는 일자리를 알고 있거나 찾게 된다면, 소생을 추천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하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선생의 체면이 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리다.

현재 소생은 급료로 매월 700탈러(thaler·현재 약 5천달러)를 받고 있으며, 평소보다 장례식이 더 늘어서, 그 비율만큼 수입이 더 있었긴 하오이다. 하지만 건강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 따라서 이 수입도 줄게 되오. 작년 같은 경우에는, 장례식 연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평년에 비해 매월 100탈러 이상 줄었다오.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튀링겐에서는 매월 400탈러로도 충분하게 살 수 있었으나, 여기서는 높은 생활비 때문에 그보다 두 배 이상의 돈이 든다오.(이후 생략)"

바흐는 자리를 옮길 때마다 자신의 전임자보다는 더 많은 급료를 받았지만, 그것이 생활비로 충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편지를 읽다 보면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생각난다. 주인공이 승진하고 급료가 올라도 부인이 매번 살림의 규모를 키우고 씀씀이를 늘리다 보니 항상 방 하나와 오백 루블이 부족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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