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자매 중 바로 아래 여동생을 먼저 보내고 말았다. 제일 가깝게 지내면서 가장 많이 다투었지만, 그 빈자리는 너무나 공허했다. 그렇게 훌쩍 떠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느 날 동생이 힘없는 목소리로 울먹이면서 전화가 왔다.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 배가 불러와 병원에 갔더니 복수가 찼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데 어쩌면 좋으냐고 오히려 내게 물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내색 않고 요즘 의술이 얼마나 좋은데 걱정이냐고 나무랐다.
다음 날 바로 큰 병원에 입원해서 이것저것 검사가 시작되었다. 너무 오래 여러 가지를 검사해서 검사하는 데도 지칠 지경이었다. 검사 결과는 확실하게 이거다 하는 병명 없이 지루하게 이어져 갔다. 어느 날 동생이 내게 말했다. "언니, 언니의 1년을 내게 줘.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 곁에서 1년만 나와 살아줘" 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몸이 아프니 그냥 응석이겠거니 생각했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했던가. 병원에 있으니 답답하고 위로와 말동무가 필요했는지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문자가 왔다. 올 때 무슨 반찬을 만들어 오라거나 내가 입은 옷이나 모자를 보면 나도 그런 거 하나 사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사다 줬지만, 병원에 있으니 입고 쓰고 할 일이 없어 사다 준 걸 한 번도 입거나 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은 나름대로 바쁜 일이 있어 전화와 문자에 대답을 못 했더니 마지막 문자가 가슴을 찢어 놓았다. 나는 드디어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았다면서 나는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면서 비통한 사연을 담은 문자가 왔다. 우여곡절 끝에 첫 항암 주사를 맞았다. 그날로 바로 파김치가 되어 모든 면회를 거부하고 고군분투하였다. 며칠이 지나 겨우 안정되어 밥도 먹고 회복되어 가는 듯 보였다.
동생은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2차 항암을 서둘렀다. 난 길고 긴 싸움이니 몸부터 먼저 만들어 2차 항암하자고 제발 조금 더 회복된 뒤 하자고 간곡히 말렸다. 그때 피치 못할 여행 계획이 있었는데, 갔다 온 후에 하자고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평소에 그렇게 고집 센 아이는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면 빨리 맞겠다면서 서둘렀다. 언니 여행 갔다 오면 말짱해져 있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여행 중 오밤중에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길한 예감에 무서워서 그 전화를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조카에게 전화했더니 역시나 나쁜 예감은 어김없이 맞고 말았다. 입원해 있던 병원 영안실로 오라고 한다.
형제자매 중 가장 많이 다퉜고 가장 깊이 정들었고 만나면 할 말이 제일 많았고 함께 하고픈 일도 아주 많았던 동생이었다. 나이 차이도 별로 없어 친구 같은 동생이었다. 지금은 마냥 보고 싶고 만나서 얼싸안고 심장의 고동 소리도 듣고 싶다. 천국에서 하루만이라도 휴가를 준다면 그 시간을 몽땅 갖고, 나의 1년을 기꺼이 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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