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명문가 종손·종부들이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가양주 빚기에 나섰다. 집안 불천위 제사 등 특별한 날을 앞두고 아랫목에서 이불 덮어 빚어오던 '조주법'(造酒法) 그대로 '명가명주'(名家銘酒) 만들기에 나선 것.
안동의 종가 문화가 새로운 관광 콘텐츠가 되고 있다. 불천위 제사나 종가의 설·추석 등 명절 풍속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찾는다. 이들의 눈에는 자연스레 종가의 음식과 술에 관심이 간다.
종손과 종부들이 수백여 년을 이어온 술 맞은 어떤지, 아니면 종가 술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고, 어떤 술 빚는 방법이 전해지고 있는지 등이 궁금하고 그것이 새로운 관광 콘텐츠가 된다.
이미 전국 숱한 명문가들이 가양주를 산업화해 지역 관광상품으로 선보이고 있다. 안동의 종가 가양주들도 종손·종부의 손으로 빚어 종가 문화를 알리고, 또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선보일 날이 머지않았다.

◆안동소주 첫 상업 제품은 '제비원 안동소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소주는 단연 '안동소주'다. 고려시대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동소주가 본격적으로 제품으로 만들어져 알려진 것은 1920년대 생산된 '제비원 안동소주'다. 안동지역 상징 제비원 미륵불을 새겨 넣은 상표로 유명하다.
안동 최대의 부자였던 권태연 씨는 안동시 남문동 2천645㎡(800평)의 대지에 소주공장을 세웠다. 공장이름을 '안동주조회사'로 짓고 제비원표 안동소주로 상품화,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지금의 안동소주는 9곳에서 생산하고 있다. 저마다 제조 방법이 다르다. 민속주 안동소주는 탁주 원액을 증류해 특유의 짙은 향이 있다. 청주를 증류하는 명인 안동소주는 보다 부드럽고 깔끔한 맛을 낸다. 버버리찰떡을 만들다 찹쌀로 빚은 '올소'는 감칠맛이 일품이다.
'명인 안동소주'는 안동의 반남 박씨 가양주다. 박재서 명인의 15대조 은곡(隱谷) 박진(1477~1566)으로부터 비롯됐다. 박 명인의 조모 남양 홍씨를 거쳐 며느리인 영월 신씨에게 전수됐다. 지금은 박 명인의 아들 박찬관 대표와 손자 박춘우 영업본부장으로 잇고 있다.
'민속주 안동소주'는 고 조옥화 명인이 친정어머니와 시댁인 안동 김씨 가문의 가양주를 배워 빚었다. 민속주 안동소주 제조법은 조 명인의 아들 김연 박씨와 며느리 배경화 씨가 이어가고 있다. 배 씨는 안동소주를 주제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종손 술 빚게 한 경자년 대통력 여백 술 관련 글
안동 하회마을 서애 종가 충효당 류창해 종손은 요즘 하루에도 몇 차례 씩 술 익는 양조장에 들른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가양주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 놓고 있다.
종손의 어머니인 14대 종부 고 최소희 여사는 경주 최부자집 딸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집안 여인네들이 큰일을 앞두고 술 빚는 모습을 일상으로 보면서 자랐다. 시집와서는 큰집 종부로 불천위 제사며 4대 봉사에 필요한 술을 손수 빚어왔다.
류창해 종손은 언젠가는 가양주를 관광객들에게 선보이고 싶어 했다. 수년 전 뜻있는 몇몇 이서 구성한 가양주 산업화 모임에도 참여했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전통주 제조 방법을 배우기 위해 서울과 안동을 수개월간 다니기도 했다.
"종손이 술을 빚는 모습이 격에 맞지 않다"는 주변의 말들도 있었지만, 종손이 본격 술 빚기에 나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11월 24일 문화재청과 국외소재 문화재재단이 일본에서 환수한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1600년 경자년 달력)이 공개되면서 본문 여백에 술과 관련된 글들이 빼곡히 쓰인 것을 본 후다.
여기에는 감주(甘酒), 향료(香醪·향기로운 막걸리), 점주(粘酒·찹쌀술), 도인주(桃仁酒), 백자주(栢子酒) 등 5가지의 술 제조법을 비롯해 술을 급하게 빚는 방법, 술 제조법, 술에서 빨리 깨는 방법, 악기를 다스리는 술 만드는 방법, 가을보리싹으로 술을 빚는 서청법(黍淸法) 등 다양한 술 레시피가 기록돼 있었다.
류창해 종손은 "서애 할배가 즐겨 찾던 옥연정사에서 이름을 딴 '옥연'(玉淵)으로 술 이름을 짓고, 대통력에 나오는 술 만드는 방법대로 가양주를 빚어 일반인들에게 선보일 계획"이라며 "서애 할배께서도 술을 즐겨 드시고, 술에 관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내가 술 빚기에 나선 이유"라고 했다.
◆간재 선생 효심 깃든 약술 빚어 '명주'로 선보여
간재 변중일 종가 변성렬 종손과 주영숙 종부는 간재 선생의 효심이 담겨 있는 증류 소주인 '숙영주'(淑英酒) 빚기에 요즘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다.
황금 들판을 이룬 금계리 가을 황국과 청정한 소나무가 만나 피로회복에 좋은 약술을 빚어 오던 집안 내력을 그대로 담아낼 각오다. '숙영주'는 부모님께 드리는 작은 '효'의 시작임을 알린다는 마음이다.
간재가 18세 되던 해 임진왜란으로 왜적이 집안에 들이닥치자, 어머니를 인근 삼밭에 피신시키고, 이질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할머니를 홀로 보살폈다.
왜병이 할머니를 죽이려 하자 "나 같은 불효 손자는 죽어도 아무 상관없으나, 팔순인 할머니만은 꼭 살려주시오"라 죽음을 무릅쓴 간재의 용기와 효심에 감복한 왜병은 집안 물건 하나 건들지 않고 깃발과 칼 한 자루를 신표로 주고 가 더 이상 왜병에게 화를 당하지 않았다.
당시 왜병이 주고 간 길이 1.2m의 일본도는 지금도 간재 종가에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간재는 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질 만큼 효심이 깊었다.
간재 종택 마당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마셔도 마르지 않는 맑은 우물이 있었다. 이 물과 가을황국으로 약술을 빚어 어른들의 건강을 챙겨 온 가양주에 깃든 철학을 '숙영주'에 오롯이 담아낸다는 각오다.
특히 송이 망하자 고려 황주로 귀화한 조상 내력과 시조 할아버지인 변안열이 홍건적의 난을 물리치고 왕을 보필했던 일화에서부터 집안은 일찍이 소주, 안동 소주와의 인연이 깊다는 자부심으로 '명가 명주'를 빚어낼 각오다.
변성렬 종손은 "숙영주는 늘 깨어있고, 경로효친의 정신을 이어가길 바랐던 간재 할배의 염원을 담은 약술로 몸을 가볍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명주'로 빚어낼 것"이라고 했다.

◆청아하고 담백한 종가 술, 안동 강건한 기상 스민 술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퇴계 태실이 있는 노송정 종택은 퇴계 선생의 조부인 이계양 공이 낙향해 터를 잡은 곳이다. 송재 이우, 온계 이해에 이어 퇴계 이황이 태어난 500여 년 유서 깊은 곳이다.
최정숙 노송정 종부는 성주 죽헌 최항경 불천위 종갓집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친정어머니로부터 종갓집 예법을 배웠다. 특히, 양조장을 운영했던 친정에서 일찌감치 술 내리는 법을 배웠다.
종부가 빚어내는 가양주는 '노송주'(老松酒)다. 온혜 일대는 서속(좁쌀)을 주로 경작했다. 노송정 종가 가양주 재료는 좁쌀이다. 지극정성으로 술을 빚어 방안 가득 좁쌀향이 퍼지면 청주를 떠서 제사에 사용했다.
500여 년 한결같이 큰소리 내지 않고 조용하며, 따뜻하고 온화한 미덕을 이어온 노송정 종부들의 긍정적이고 맑은 마음은 노송주의 맛과 향을 그대로 닮아있다. 좁쌀이 귀해진 요즘 찹쌀을 더 넣어 술을 빚지만, 청아하고 담백한 종가의 술로 빚고 있다.
안동권씨 권철한 안동종친회장은 '태사주'(太師酒)를 빚어낼 각오다. 치열한 고창전투에서 대패를 거듭하던 절체절명의 태조 왕건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던 고창지방의 술을 빚어낼 계획이다.
태조 왕건이 대구 공산전투에서 대패하고 견훤 군사에 쫓겨 고창(지금의 안동) 땅에 이르러 호족의 도움으로 맞설 준비를 할 때, 견훤군은 주모 안중의 객주에 머물면서 장독마다 가득한 달고 향이 좋은 고삼주를 마시다가 인사불성이 돼 왕건군에게 패하게 된다.
이때 왕건은 세명의 호족에게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시조와 함께 임금의 스승이라는 '삼태사' 칭호를 내렸다.
'태사주'는 당초에는 고삼을 원료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부작용이 없고 약효를 인정받은 단고삼(황기)을 사용해 빚어낸다. 단고삼은 만성피로, 면역기능, 당뇨에 효과적인 약재다.
권철한 회장은 "태사주는 은은한 호박색으로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뒷맛이 느껴지는 독특한 맛으로 천년동안 외풍에 흔들리지 않던 안동의 강건한 기상이 스며 있는 술"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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