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Meritocracy)는 사회적 지위와 보상이 개인의 능력과 실적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좋아한다. 이런 유행가 가사가 있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능력주의를 실현하려면 먼저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최근 미국 대법원이 '소수인종 우대'(Affirmative Action)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 제도는 입학과 취업에서 소수인종을 우대한다. 교육 불평등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능력이 나은 사람들이 차별을 받았다. 차별을 시정하니 역차별이 발생했다. 이번에 위헌 결정이 내려진 사안은 대학 입학이다. SAT 점수가 높은 백인, 아시아계 학생들 대신 히스패닉, 아프리카계 학생들이 합격했다. 백인, 아시아계 학생들이 화낼 만하다. 점수가 낮은 학생의 합격은 능력주의에 반(反)한다. 하지만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을 시험 점수로 평가하는 것도 능력주의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능력을 정확하게 측정해야 능력주의가 실현된다. '좋은' 시험이 필요하다. 변별력이 있어야 좋은 시험이다. 속칭(俗稱) '킬러 문항'을 출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 킬러 문항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내용이다. 초등학교 시험에서는 중학교 문제가, 중학교 시험에서는 고등학교 문제가 킬러 문항이다. 그 결과, 대학교 문제가 수능시험의 킬러 문항이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문제를 풀어야 합격한다. 이보다 더 '나쁜' 시험이 없다. 나쁜 시험으로는 능력을 제대로 측정할 수 없다.
중학교 3학년인 둘째 아들 수학 시험에 킬러 문항이 있었다. 대학교에서 응용통계학을 전공하는 첫째 아들이 못 풀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100점을 받은 학생이 70명을 넘었다. 중학교 기말시험에 왜 킬러 문항을 넣었을까. 특목고에 진학하려는 학생들과 일반고 진학 학생들을 구분하기 위해서인가? 비싼 학원비를 낸 학부모들이 보람을 느끼게 하려는 것인가? 시험이 쉬워서 '아무나' 100점을 받으면 돈 쓴 보람이 없을 것이다.
나도 3년 전에 킬러 문항을 경험했다. 한 국어 교사가 이메일을 보내 왔다. 내가 쓴 대학 교재를 인용해서 모의고사 평가 문제를 만들겠다고 했다. 모의고사 평가에 나온 문제를 보니 잘 만들었다. 고등학생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내 걱정은 기우(杞憂)였다. 의대 진학이 목표인 고등학생에게 물어보니 문제가 쉬웠다고 했다. 그 문제는 '준킬러 문항'도 아니었다. 나는 30년 걸려서 이해한 문제를 고등학생들이 쉽게 풀었다. 비결이 궁금해서 그 문제를 해설하는 유튜브를 보았다. 강사 해설이 틀렸다. 그러나 정답은 빠르게 잘 찾았다.
'행정고시'에도 킬러 문항이 있다. 2차 논술형시험에는 큰 문제 1개, 작은 문제 2개가 나온다. 큰 문제를 풀어야 합격한다. 큰 문제가 킬러 문항이다. 큰 문제는 푸는 것도 출제도 어렵다. 오류(誤謬) 없이 큰 문제를 낼 수 있는 교수가 많지 않다. 이들도 완전히 새로운 문제를 만들지 못한다. 대학원 문제를 변형해서 출제하기 때문에 난이도(難易度)가 학부 수준을 넘는다. 채점하면서 보니, 500명에 가까운 응시자의 답안 형식이 거의 같았다. 식(式)이 틀렸는데, 정답을 쓴 학생도 많았다. 문제가 유출됐을 가능성은 없다. 고시학원에서 비슷한 문제를 많이 풀었을 것이다.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행정고시 합격이 불가능한 세상이다.
킬러 문항은 어려워야 하지만, 너무 어려우면 안 된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어야 한다. 모범(模範)이 있다. '학력고사'에도 킬러 문항이 있었다. 예전 킬러 문항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응용해서 풀 수 있었다. 푸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수능시험은 국가가 시행한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문제를 푼다. 형식적으로는 능력주의의 끝이다. 올해 수능시험까지 4개월이 남았다. 출제에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을 쓰는 방법밖에 없다. 좋은 수능시험은 '실질적인' 능력주의의 시작이다. 이미 배운 학생과 배우지 않은 학생이 배우지 않은 문제로 경쟁하는 시험은 공정하지 않다. 불공정한 수능시험은 큰 죄악이다.
댓글 많은 뉴스
한동훈 이틀 연속 '소신 정치' 선언에…여당 중진들 '무모한 관종정치'
[매일칼럼] 한동훈 방식은 필패한다
비수도권 강타한 대출 규제…서울·수도권 집값 오를 동안 비수도권은 하락
[조두진의 인사이드 정치] 열 일 하는 한동훈 대표에게 큰 상(賞)을 주자
부동산 침체 속에서도 대구 수성구 재건축 속도…'만3' 산장맨션 안전진단 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