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반려가전(伴侶家電)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집에 오래된 반려 가전제품이 있다. 가장 애틋한 놈은 선풍기다. '모터가 좋다'는 국내 업체가 만든 제품이다. '2007년 5월 제조'이니, 함께한 세월이 16년이다. 그 사이 중국산 선풍기 2대가 고장으로 교체됐다. 고령의 선풍기는 '노환'에 시달리고 있다. 남은 힘을 짜내면서 더위를 날리려고 애쓴다. 철야 노동에 시달려도 묵묵하다. 에어컨 전기료를 걱정하는 주인의 빈한함을 헤아리듯이.

선풍기의 평균수명은 10년. 우리 집 늙은 선풍기는 사람에 비유하면 팔순, 구순을 지나 상수(上壽·100세)이다. 안방에 모셔 두고 조심스럽게 쓰고 있다. 올여름은 나겠지만, 내년은 장담 못 한다. 우윳빛 몸체는 황달이 들어 누렇다. 미풍, 약풍, 강풍의 차이가 미약하다. 그저 처연하게 돌아간다. "덜~덜~덜" 헐거운 소리, "그르렁 그르렁" 쇳소리를 내면서. 거북이처럼 고개를 자꾸 내민다. 눌러 내리면 치받는다. 목 부위는 테이프로 칭칭 감겼다.

얼마 전 낡은 카세트 라디오가 멈췄다. 라디오 청취는 물론 카세트테이프, CD까지 재생하는 멀티플레이어였다. 정이 든 물건이지만, 버릴 수밖에 없었다. 수리가 불가능해서다. 몇 년 전 안테나가 부러지고, 버튼이 고장 나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수리 기사가 옛날 제품이어서 부품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안테나는 중고 부품이 있어 해결됐다.

오래 쓴 물건은 버리기 아깝다. 경제적 이유가 다는 아니다. 똑같은 제품도 쓰는 사람에 따라 속성이 달라진다. 공장에서 나올 때는 제품이지만, 사람에게 가면 물건이 된다. 긴 세월 곁에 둔 물건은 유별나다. 물건은 고유성(固有性)을 지닌다. 물건은 시간과 공간에 숙성된다. 사람과 추억에 스며든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린다. 대량생산 체제에선 대량소비가 미덕이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이제는 아껴 쓰고 고쳐 써야 한다. 기후변화 시대의 생존 방법이다.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가 주목받고 있다. 전자제품을 오래 쓰고 싶어도 고장 나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부품이 없거나 수리비가 비싸기 때문이다. 미국, EU는 소비자가 제품을 고쳐 쓸 수 있는 권리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제품의 사용주기 연장을 위해 수리권 보장의 법적 근거를 논의하겠다고 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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