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어젯밤에 밤새도록 포장을 해도 박스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꿈을 꿨어."
1930년대 찰리 채플린의 대표적인 영화<모던타임즈>는 인간이 자본의 기계처럼 반복되는 산업자본주의 시대 전환을 그려내고 있다. 벨트 공장에서 일하는 단순 노동자 찰리가 바라보는 30년대 삶의 풍경은 인간도, 자본의 구조도 나사못을 조일 수밖에 없는 강박에 시달리며 정신이상자가 되어간다.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비대해진 인구밀도와 거대해진 세계 경제는 자본의 구조와 노동의 토양으로 달러를 빨아들이고 있고 70년대 산업화 고개를 경부고속도로로 넘어온 한국경제도 강력한 자본의 엔진을 달고 세계로 달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 노동 환경의 현실과 비정규직 문제, 복지사회의 진입은 더디다. 시간제 근로와 아르바이트도 경쟁 시대에 '청년실업' 문제와 복지 사각지대를 안전한 삶으로 전환하는 것은 정부가 풀어야 할 정책이면서도 현실 체감 상승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연극 <위시리스트>(연출 곡수인, 작, 캐서린 소퍼, 프로젝트아일랜드, 씨어터 쿰 )는 19세의 극 중 인물 탐신 카모디(이정현, 이예진 분. 이하 탐신)는 강박 장애를 앓고 살아가는 오빠 딘 카모디 (송현섭 분, 이하 딘)을 돌보며 살아가는 영 케어러 (Young Carer)의 사회제도 문제와 영국 물류센터 노동 현실을 다루고 있다. 한국 사회도 중증질환과 장애를 겪고 있는 가족을 돌보고 살아가는 810명의'가족 돌봄 청년 실태조사'에서 평균 가사노동, 병원 동행, 간병 보조 등의 평균 돌봄은 주당 21.6시간으로 조사되었다. 돌봄 기간도 평균 약 4년(46.1개월) 가까이 됐다. 심각한 것은 가족 돌봄 청년의 경우 우울감 유병률은 약 61.5%로, 가족을 돌보지 않는 청년(8.5%)의 7배를 웃돌았다는 통계를 발표했고 13세 미만 '가족 돌봄 아동' 들의 열악한 복지지원제도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뿐인가. 주 71시간 노동으로 점심시간은 12분 정도였던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와 노동, 열악한 물류센터 근무환경과 최저임금 논란 후에도 여전히 안전지대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저임금과 비정규직 노동 환경,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 안전한 사회복지제도는 산업화 고개를 단숨에 넘긴 한국 사회만큼 관련 법안과 지원정책은 느리기만 하고 일용직과 비정규 노동 환경은 자본으로 기계화되어가는 <모던타임즈>의 100년 전 사회환경을 재현하고 있다. 캐서린 소퍼의 <위시리스트>는 영국 사회의 영 케어러의 생존 투쟁과 사회복지 문제, 물류센터 노동 환경의 불합리한 구조에 대해 접근하고 있으면서도 투영되는 사회는 영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아동, 청년 가족 돌봄 복지제도도 걸음마 단계다. 자본의 폭력으로 생존 투쟁의 사투를 벌이면서 작성하는 희망의 '위시리스트'는 절망과 죽음으로 내모는 자본환경의 구조인 것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삶을 바라보며 묻는다. "당신은 사회에 홀로 남겨진 '딘'과 '탐신'의 삶을 바라보며 두 사람을 위해 어떠한 위시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조연출로 활동하며 <난폭과 대기>(2020) 이후 두 번째 작품인 <위시리스트>는 곡수인 연출 번역으로 지난해 초연된 후 올해 공연은 프로젝트 아일랜드의 2023 '공연예술 중장기 창작지원사업' 레퍼토리 작품이다.
◆ 사회구조로부터 시작되는 '삶의 절망'과 강박장애
씨어터 쿰에 세워진 <위시리스트> 무대는 사회와 자본, 복지로부터 고립된 남매의 삶을 구조화한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오빠 딘의 강박증은 사회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립되어 있으며 탐신은 오빠를 부양하며 살아간다. 지하로 보이는 집은 화장실과 작은 거실로 연결된 부엌이 보이고 전자레인지와 대형 쿠스쿠스 박스가 보인다. 그 뒤로는 배송물류센터 환경이 연결되어 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배송 물품들이 채워져 있고 앞으로는 패킹 포장작업을 하는 단이 세워져 있다. 상단에는 1분에 8개씩 1시간에 480개의 박스 포장을 해야 하는 목표가 숫자로 표기될 수 있는 스크린이 보인다. 구부정한 자세, 느릿한 말투, 헤드폰을 쓰고 헤어젤을 바르며 머리에 강박적 집착을 보이는 딘은 집 밖으로는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인 삶을 들어낸다. 연극은 집과 물류센터의 삶이 연결되어 볼 수 있는 구조이면서도 남매의 삶은 구조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그의 유일한 소통은 종일 화장실에 들어가 음악을 듣거나 헤어젤을 바르고 머리에 집착을 보이는 행동들이 반복되고 음식조차 혼자 만들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 딘의 삶의 공간은 밀폐된 화장실인데, 공간은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살아가는 현재성이다. 화장실은 마치 딘의 방처럼 헤어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헤어젤로 딘 만의 머리 스타일을 만들면서도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없는 강박적 폐쇄성은 사회로 나가려고 하는 강렬한 욕망을 보이면서도 타자의 소통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러한 딘의 내면은 모자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딘은 외출 준비할 때나 동생 탐신의 물류센터 동료 루크(차준규 분)가 집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모자를 눌러쓰는 타인의 두려움으로 인식하는 강박적 행동 장애를 보이면서도 헤어스타일과 머리, 헤어젤에 대한 집착은 고립된 자신과 삶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표상(表象)이다.
타자와의 소통과 관계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는 딘의 강박적 장애는 외부적인 환경으로부터 오는 후천성 장애를 보인다. 장면을 돌려보자. 루크가 회상하는 딘은 고교 시절 보충수업에서 역사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모범생이었고 친구들한테도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면 정상적이었던 딘 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재한 삶에서 오는 사회적인 충격과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트라우마로부터 기인(起因)한 것으로 보인다. 헤어젤을 바르고 머리 스타일에 집착하는 행위는 딘의 정상적인 행동이다. 외부로 나가려는 내면의 집착이 강박 장애의 반복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딘이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고 집 밖의 사회로 구조될 수 없는 것은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시스템의 문제이다. 청년노동 환경과 영 케어러 복지제도가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오른쪽 문은 외부와 유일하게 연결된 통로이면서도 딘은 현실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것은 90년대의 대표적인 너바나의 노래' Smells like teen spirit'이다. 집을 삼킬 것 같은 락의 굉음 소리를 듣고 딘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적인 행동을 보인다. 90년대 미국 청년문화의 욕망을 상징하는 굉음은 소음만 강렬할 뿐 삶을 구원할 수 없는 메아리다. 이들이 버텨낼 수 있는 것은 엄마와 함께한 동작들이다. 입고 있는 모든 것을 왼손으로 두 번, 오른손으로 두 번씩 두드리는 일이다. 연극은 노동능력 평가를 받은 오빠 딘의 질병 수당과 개인 자립자금, 간병 수당까지 끊기면서 생계와 돌봄까지 책임져야 하는 탐신이 쿼츠 에이전트를 통해 물류센터 시간제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으로 극은 시작된다.
◆ 물류센터 노동 환경과 생존경쟁의 위시리스트 작성법
2장부터는 딘을 돌보며 근무 생존경쟁에 뛰어든 탐신의 물류센터 노동 환경과 딘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11장까지 교차적으로 전환된다. 작가는 극적인 내러티브를 배치하지 않는다. 영케어러의 삶과 물류센터 노동의 현실을 경험한 이야기처럼 극 중 인물 딘과 탐신 그리고 루크와 물류센터 관리자 리드(지남력 분)를 통해 '제로아워'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구조와 사회 돌봄 복지 문제를 현실감 있게 투영한다. 물류센터의 환경구조는 풀필먼트 센터(Fulfillment center)로 불리는 아마존 주문처리 물류센터의 근무환경을 극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국의 세계 최대 아마존 물류센터 노동자도 "나는 로봇이 아니다"라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강렬한 노조 파업을 벌인 바 있다. 우선 탐신의 물류센터 작업환경을 보자. 물품에 맞는 상자를 꺼내 운송장을 스캔하고 주문자와 상품을 확인한 다음 박스 테이프로 패킹하는 단순 작업이다. 단순 작업의 핵심은 속도전이다. 포장작업 완료 후 숫자가 스크린으로 자동 표기되는 구조로 되어 있고 점심시간은 30분 주어진다. 하루 평균 8시간 박스 포장작업을 한다면, 1인이 작업해야 할 분류처리 목표는 3,840개의 포장을 완료해야 한다. 숙련된 노동자도 1시간 400개를 채우기 힘든 구조에서 탐신과 같은 비숙련자가 감당하기 힘든 작업환경과 자본기업에 제시하는 목표는 비현실적이다.
화장실도 5분 정도 거리에 있고 포장작업 중 물을 마시는 것은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노동 환경이다. 기업은 이러한 노동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관찰한다. 풀필먼트 운송 팀장 리드의 관리는 엄격하다. 규칙에 어긋나면 0.5점씩 벌점을 부과하고 누적은 해고와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드로 분한 지남혁은 등장부터 강한 인상으로 연기를 하는데 흙빛의 이미지와 곱슬머리로 역할의 캐릭터를 살려내며 기업의 규칙으로 정한 능률과 목표로 평가되는 거대자본의 노동시장과 기업구조의 모순을 연기로 살려내고 있다. 탐신의 핸드폰을 압수하며 규칙을 쏘아붙이던 리드는 극 후반에 " 내가 여기서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유만 있다면 1초도 안 돼서 잘릴 거라는 생각은 안들어?(중략) 화장실에 다녀온 시간을 쟀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쟀다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목표보다 결과가 낮으면 오만가지 방법 다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돼. 나도 너랑 똑같아. 이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중략) 저 사람들이 보기엔 이건 정당한 일이야. 어떻게 하면 목표를 채울지만 고민하니까. 어딜 가도 똑같아"하며 화장실 다녀온 시간만큼 벌점을 부여한 리드도 자본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냉혹한 벌점을 부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탐신과 딘의 삶의 절망은 동료 루크가 준 마리화나를 피우며 위로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이면서도 작가는 절망보다 희망을 투사한다. 딘의 먹고 싶은 것을 작성하는 위시리스트 장면에서는 여전히 엄마와 살았던 가족의 정상적인 삶의 강한 애착을 보인다. 구직활동을 위한 딘의 노동능력 평가서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평가하고 질병 수당과 복지제도 사회시스템의 오류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고립된 이들의 삶을 희망의 온기로 바라보는 것은 동료 루크이고 1시간에 370개 이상의 목표를 채우는 탐신을 위해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평가 기회를 주는 것은 리드이다. 루크는 탐신이 화장실에 다녀온 시간 사이에 패킹작업을 채워주면서도 5분 동안 작업기록이 안 되어 있다는 리드의 말에 허리가 아파 스트레칭했다고 둘러대며 벌점을 맞으면서도 두 사람 관계는 탐신 집에 방문할 정도로 발전된다. 대학에서 물리학이나 법을 전공하고 싶다는 탐신의 말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루크는 탐신과 미트 로프의 ' I'd anything for love' 음악 사이로 격렬한 키스의 장면으로 전환되면서도 연출은 잠에서 깬 딘을 두 사람 관계의 뜨거운 무거움을 웃음으로 유도하는 상황으로 연결한다.
8장부터는 딘이 기초수급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통보를 서면 받으면서 시작된다. "(중략)씨발 상관안해, 우리끼리 잘할 수 있어. 얘네 없이도 잘 할 수 있어. 평가 재심사?(중략) 이건 불공평해 나 못하겠어 나 엄마처럼은 못해 오빤 다 잊어버린 것처럼 살잖아. 보고 싶지도 않아?" 딘은 헤어젤 통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이거 다 이상한 짓이라는 거 나도 다 알고 있어. 나 이제 그만 할래"라는 두 사람의 대사가 가슴으로 박힌다. 여전히 절망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사회복지제도와 노동 환경도 아니다. 탐신의 정규직 전환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리드이며, 탐신이 1시간의 목표를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도 대학 입학을 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고 사랑을 보이는 루크이다. 마지막 장면은 물류센터에서 패킹하는 탐신과 집에 홀로 남겨진 딘의 집 상황이 한 장면으로 연결된다. 딘과 탐신의 내면을 동화시키는 작가적 설정이 뛰어난 장면이다. 포장하는 탐신사이로 딘은 쿠스쿠스를 넣는 냄비를 인덕션에 올리고는 전기를 올린다. 뜨겁게 달아오르며 끊는 물소리 사이로 딘은 멍하게 바라볼 뿐이다. 이사이 장면으로 탐신은 포장작업 도중 딘이 사용한 디자인과 브랜드인 산업용 젤 통을 보고는 누군가 속삭이는 환청을 느낀다.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엄마와 하던 대로 왼쪽으로 두 번, 오른쪽으로 두 번을 반복적으로 두드린다. 마치 두 사람을 누군가 수호(守護)하는 것처럼. 탐신의 불길한 직감은 우연이었을까. 끊은 냄비에 양손에 화상(火傷)을 입은 딘을 향해 탐신은 오빠의 두 손을 랩으로 감싸고 " 우리가 몇 살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중략) 내가 헤드폰을 벗고 오빠한테 뭐 하냐고 물어봤는데 도시 이름을 외우고 있었잖아. 기억나? 오빠 때문에 나도 다 외우고 있었는데. 하도 외우고 있으니까 엄마가 엄청 뭐라 했잖아. 왜 그렇게 외우고 있었을까?" 딘과 탐신이 외웠던 도시는 미래가 불투명한 절망의 삶을 벗어나고 싶은 희망의 도시이면서도 잠재된 기억을 환기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과 삶이 평등하게 생동하는 도시로 평범하게 전진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래서일까 연출은 마지막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삶에 희망을 장전한다. 산업용 헤어젤을 주문한 것이 딘이라는 걸 고백하는 대화가 흐른 뒤 딘과 탐신은 손을 포개고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바라보며 극은 끝난다. 관객은 이 장면을 바라보며 이들을 위한 <위시리스트>를 침묵으로 작성한다.
◆ 배우와 작품의 위시리스트
이번 곡수인 연출의 <위시리스트> 장점은 작가의 '웰 메이드'(well-made)플롯을 촘촘하게 무대로 배치하면서도 사회제도와 집의 구조 관계를 동일한 문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무대를 구조화한 것이다. 장면전환과 시간의 흐름을 딘과 탐신의 동일화된 내면으로 교차 연결하는 방식이 돋보였다. 결말 장면도 루크와 리드 같은 인물로 인해 절망의 삶은 희망의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갈 만한 사회라는 인식과 '희망의 기다림'으로 바라보려는 연출적인 태도이다. 두 번째는 신진연출들 사이에서 보일 수 있는 장면의 과도한 확장성과 배우들의 연기가 극으로 투영되지 못한 채 인상적인 캐릭터와 연기로 표현될 수 있도록 장면을 배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극 안으로 배우들의 연기와 캐릭터를 쌓아 올려 과한 장면은 덜어내고 배우들의 연기는 극으로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이 무대를 통해 투영되니 작가의 서사는 선명해진다. 영케어러로 살아가는 탐신 이정현의 연기는 오빠를 위해 자신의 삶을 도려내야 하는 아픔이 베여 있고 두 사람의 삶을 마주하며 이들을 위한 마음의 위시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예진의 연기도 이정현과 대비되어 안정적이라는 평가다. 송현섭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로 강박 장애를 앓고 있는 신의 역할로 분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연기보다는 인물과 동화되려는 내면성으로 마지막 장면도 첫 장면처럼 과함이 없이 딘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루크의 차준규는 극 중 인물을 통해 희망을 장전할 수밖에 없는 인물로 그려냈다.
이번 작품공연으로 배우의 재발견과 수확은 리드로 분한 지남혁이다. 그동안 <현장검증>,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장녀들>에서 좋은 연기에도 주목받지 못한 점이 아쉬웠는데, 이번 <위시리스트>에서는 아마존 물류센터의 노동 현장의 초를 다투는 엄격한 관리자의 모습과 인간적인 캐릭터를 연기로 구현하며 리드의 등장만으로도 장면은 살아났고 현실감 있는 연기로 물류센터 노동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작품이 아쉬웠던 점은 작가의 이야기만 들렸다는 점이다. 연출의 시선이 극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거대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의 현실과 영케어러 복지제도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감상적인 희망의 기대보다는 절망과 아픔이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연출의 디테일은 때로는 연기의 앙상블과 구도, 공간과 장면 배치의 표현방식이 보다 작가 언어를 연출의 방식으로 확장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작품은 안정적으로 작가가 설계한 희곡의 집을 잘 지어서 공감은 되나 현실을 각인시킬 만한 충격은 없었다. 그럼에도 곡수인 연출의 이번 <위시리스트>는 20대 연출가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안정되어 있고 청년 연출 그룹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한국 사회의 물류센터 노동 현실과 가족 돌봄 청년으로 불리는 영케어러들의 삶을 공감하고 싶다면 추천하는 작품이다. 16일까지 시어터 쿰에서 공연된다. 110분 동안 지루할 틈을 보이지 않는 작가, 배우, 연출의 삼박자가 고른 <위시리스트>를 느낄 수 있다.
|연출 미니인터뷰
- 작년 초연에서 올해 재공연이다. 작품을 직접 발굴했는데, 희곡의 어느 지점이 연출로 끌렸나.
"<위시리스트>라는 제목부터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우리는 늘 희망하는 것을 적지만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었다. 희곡을 읽을 때 우리나라에 풀필먼트센터(물류센터)의 일이 낯설게 느껴졌고 극의 서사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작품에서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 전작과 달라진 점은.
"탐신과 딘의 인물 설정을 보다 장면을 디테일하게 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액팅코치 남동진 선생님과 배우들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인물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전작에 없었던 장면들도 들어가게 되었고, 변형된 장면들도 있다는 점이 새로워진 변화다. 영국의 복지제도가 우리나라 관객에게 와닿을 수 있도록 연출적으로 신경을 썼다."
- 한국 사회도 물류 노동자들의 사회적 문제가 많다. <위시리스트>는 복지와 노동의 문제 등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데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영케어러의 존재는 2021년부터 우리나라도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수많은 탄원서와 시스템의 변화를 촉구하는 여론에도 국가적 해결책은 더디다. 지금도 많은 영케어러들이 고된 삶을 이겨내고 있다. 창작진과 관객 여러분들이 우리 주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이들의 삶을 보고 잊지 않았으면 한다. 불합리한 시스템에서 결국 노동으로 해결해야 하는 이들의 모습을 봐주셨으면 한다."
- 어찌 보면, 딘이 위시리스트를 작성해도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는 삶이다. 집도, 물류센터의 노동도, 이들의 삶은 달라질 게 없는 사회시스템과 제도의 문제는 한국 사회도 크다. 이러한 메시지를 연출은 극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말하고 싶었나.
"초연 이후 1년이 지난 지금의 복지, 노동 환경을 공부하고 경험했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과 마주했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사람들을 만났다. 때문에, 극 안에서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인물에 집중하려 노력했다.다. 시스템에 따를 수밖에 없는, 그 사각지대에서 홀로 삶을 이겨내야 하는 과정에서 불합리한 노동 환경으로 향하고 자신을 잃어가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 극 중 인물 '딘 카모디'가 노트를 꺼내 자신의 위시리스트를 작성한다. 이 부분이 극과 약간에 동떨어진 느낌이 든다.
"수많은 사람이 위시리스트에서 물건을 골라 구매하는 물류센터 장면 이후 딘 카모디가 위시리스트로 작성하는 것은 고작 간단한 먹을거리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살 수 없는 현실을 상황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동시에 딘이 직접적으로 엄마와의 추억을 꺼내놓는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탐신과 딘 남매가 부모 없이 살아가면서 날 선 말이 오간 뒤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을 풀 수 있는 것은 엄마와의 추억을 함께하며 갖지 못하지만, 원하는 것들을 리스트로 써보는 행위이다. 연출로 딘이라는 인물과 맞닿아있는 장면이었다."
- 루크도, 리드도 탐신을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도와주려고 한다. 문제는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사회적 환경에 있는데(사회 노동제도, 복지) 이 두 가지가 좀 더 심리적인 강박으로 올 수 있는 제도의 문제가 작게 느껴졌다.
"사회적인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심리에 더 집중했다. 작품에는 사회적 제도가 인물화 되어있지 않다. 그저 전화, 우편으로만 전달되며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시스템의 행태를 더 드러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무관심으로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강조하고자 했다."
- 27세의 젊은 연출가다. 앞으로 연출의 위시리스트는.
"가장 가깝고 공감할 수 있는 청년, 청소년 세대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 앞으로 기억하고 감각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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