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럽다는 생각은 오직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건국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이승만의 공과(功過)로 인한 진영 간의 논쟁으로 매번 좌절되었다.
그 원인 중 하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1946년 6월 3일 '정읍 발언'으로, 이는 남과 북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판단하고,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강력히 주장한 것이었다 그의 발언은 항상 분단의 원흉이라는 인식으로 자리매김되며 진영 간 유불리 논리에서 공격의 빌미로 제공되어 뒤집어씌우는 데 딱 좋은 밑천이었다. 이제 과(過)에 대한 논쟁이 중첩되지 않고 재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해방된 지 일 년도 채 되기 전에 일어난 '정읍 발언'은 그렇지 않아도 신탁통치 찬반 여론이 격화됨에 따른 내부 논쟁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분열되어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극도의 좌우 이념 충돌이 발생,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정국의 대혼란을 초래하였다.
미·소 양국이 임시정부에 참여할 우리 민족 대표 선출을 논의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했으나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는데, 이미 소련은 회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북한에 공산정권의 단독정부를 세우도록 해 1945년 9월 20일 각 도·시·군·읍·면 단위의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조선로동당 전신이었던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가 1945년 10월 개최되었으며, 소위 '민주기지론'이 스탈린에 의해 1945년 9월 최초로 하달되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민주기지론을 실행하기 위해 인민위원회의 권력 장악을 주도했으며, 1940년 9월 만주에서 도망가듯 탈출하여 3월에 소련 땅 연해주 하바롭스크에 주둔한 소련 극동군 88보병여단에 들어가 스탈린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김일성을 주축으로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 정부였던 중앙권력기관의 정권을 만들었다.
반면 남한 지역에서는 미군정 외의 그 어떠한 자치단체도 인정되지 않았고, 미군정 체제가 일본 총독부를 대신하여 지방을 장악해 나가자 인민위원회는 북한과는 달리 점차 그 기능을 잃고 해산됨에 따라 남과 북에서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가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분단의 원흉이 아니라 이미 수립된 북한의 공산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남한에 통일민주국가를 위한 주춧돌을 놓았던 것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최초의 헌법을 탄생시켰다. 이는 윤석열 정부의 국가 경영 핵심 화두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통치 이념과 공통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며, 모스크바 3상 회의와 미소공동위원회 등의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했던 그의 안목은 현실적이었으며 역사적인 선언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를 두 차례나 개최했지만 이는 소련의 위장 전술에 말려든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이미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에 스탈린에 의해 민주기지론이 제창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남북 분단의 획책으로 공격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판단되며, 그의 국제적 감각과 결단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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