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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의 소야정담(小夜情談)] 대구에 가요박물관이 있어야 하는 까닭은?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언론인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언론인

70년 전인 1953년 오늘은 6.25 전쟁의 휴전협정 체결을 열흘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자욱한 포연 속에서도 꽃은 피고지고 계절은 또다시 한여름에 성큼 들어서 있었다. 인민군의 파죽지세에 혼비백산 떠밀려내려와 애면글면 대구에 의지하던 피란민들의 풍찬노숙도 끝자락에 접어든 시절이었다. 당시 대구에서 한 곡의 유행가가 유성기 음반으로 나왔고 전란에 지친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손로원이 노랫말을 쓰고 박시춘이 선율을 붙여 백설희가 노래한 절창 '봄날은 간다'였다. '알뜰한 그 맹세에(1절), 실없는 그 기약에(2절) 봄날은 간다'로 끝맺음을 하는 불후의 명곡 '봄날은 간다'. 이보다 더 화사하고 이보다 더 서러운 봄날의 역설이 또 있을까.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간 청춘의 소멸을 속절없이 스러져가는 봄날의 풍경과 대비시킨 짙은 서정이 압권이었다.

사랑도 낭만도 피워보지도 못한채 포화 속으로 사라져간 젊음이 그 얼마였던가. 그렇게 슬퍼서 그렇게 아파서 부르던 노래였다. '봄날은 간다'에는 우리 한국인들의 애틋한 정서가 흥건히 녹아있다. 감성이 남다른 문인예술가들이 이 노래에 더 심취하는 까닭이다. 어느 문학잡지가 유명 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한 '가장 좋아하는 옛노래' 설문조사에서 1위로 뽑힌 연유이기도 하다.

자고로 봄날은 가는 것이고 청춘 또한 사위어가기 마련이다. 비록 대중가요이지만 품격을 지닌 가사와 가락 때문인지 노래는 그렇게 오랜 세월 한국인들의 애창곡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봄날은 간다'는 바로 전쟁의 상처를 보듬고 있던 대구가 낳은 가요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만으로도 대구는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 이바지한 공로가 적잖다. 그 뿐이던가. 낙동강 전선 최후의 보루였던 대구는 불멸의 전쟁가요 '전선야곡'을 탄생시켰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으로 시작하는 '전선야곡'은 달빛 처연한 전선의 한가운데에 선 병사의 내면풍경을 그리고 있다. 아들을 전장에 보낸 애끓는 모성(母性)과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의 가없는 사모곡(思母曲)이 비장하게 얽혀있다. 노래는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 소속 가수였던 신세영이 불렀다. 신세영은 1951년 가을 대구 향촌동 인근에 있던 레코드사 건물 2층 다방에서 군용담요를 둘러쳐 방음을 한채 '전선야곡'을 녹음했다고 한다.

1.4후퇴 피란민의 비애를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도 대구에서 나온 노래이다. 노래의 공간적인 무대는 북한의 흥남과 남쪽의 부산이지만, 탄생지는 대구였던 것이다. 1951년 여름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강사랑이 양키시장의 냉면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거리의 피란민들을 보고 지은 노래였다. 불현듯이 악상이 떠올랐고 즉석에서 가사를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가수 현인을 데리고 오리엔트레코드사로 가서 녹음을 했다는 것이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서사적 구조는 2014년 개봉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되살아난 적이 있다.

금순이야말로 전쟁의 혼란 속에 잃어버린 누이의 상징이자, 가족과 헤어진채 홀로 모진 세파를 헤쳐나온 억척스러운 1950,60년대 여성의 표상이었다. 국민가요나 마찬가지였던 '비내리는 고모령'도 그 배경이 대구이다. '고모령'(顧母嶺)의 탄생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엇갈린다. 하지만 격동의 세월 한국인이 넘어왔던 눈물젖은 이별의 고개요 시린 아리랑 고개였던 그 상징성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렇듯 1950년대 초반 대구 향촌동 일대는 전쟁가요의 산실이자 피란 연예인들의 사랑방이었다. 대구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문화예술적 암흑기에 한국 대중가요사에 기념비적인 노래들을 잉태하고 생산하며 우리 가요의 맥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극적 상황일수록 명곡을 빚어낸 대구의 정서는 비극적 감성인가, 초월적 이성인가?

대구(경북)는 많은 유명 가수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백년설(나그네 설움), 방운아(마음의 자유천지), 도미(청포도 사랑), 손시향(이별의 종착역), 곽순옥(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남일해(빨간 구두 아가씨), 배성(사나이 블루스), 여운(과거는 흘러갔다), 이용복(그 얼굴에 햇살을), 김동아(나를 두고 가려무나) 등이 그렇다. 가객(歌客) 김광석은 대구 방천시장에서 자랐다.

팔방미인인 아이돌 양파도 대구의 딸이고, 방탄소년단 슈가(민윤기)와 뷔(김태형)도 대구의 아들이다.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했던 작곡가 김희갑, 김영광, 배상태 등도 대구에서 활동한 가요인들이다. 그런데 이렇듯 가요의 메카인 대구에 대중가요박물관이나 전쟁가요박물관 하나 없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대중가요만큼 곡진하게 반영할 수 있는 음악 장르가 또 있을까.

어려운 시절일수록 노래는 위로이고 희망이지 않았던가. 상처와 유린으로 얼룩진 우리 근현대사에서 민초들이 피폐한 현실을 견뎌내게 한 대중가요의 저력을 결코 폄훼할 수 없다. 우리 한국인은 대중가요와 더불어 삶의 희비를 공유하며 망국과 광복, 분단과 전쟁, 혁명과 독재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와 정보화 시대에 이르는 굴곡진 역사의 격랑을 건너왔다.

대구는 음악의 도시이다. 국제오페라축제와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열리는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이다. 그런데 정작 당시의 사회상과 민중의 희노애락을 가장 진솔하게 담고 있는 대중가요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것은 역사의 구비마다 당대의 서정과 대중의 감성을 생생하게 머금었던 추억의 창고이자 풍정의 곳간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명품 막사발의 가치를 모르는 청맹과니의 궁색함이다. 대중가요는 한 시대의 체험적 요약이면서 정서적 통찰이기도 하다. 70년 전 대한민국의 한가운데였던 항촌동에서 대중가요의 프리즘으로 대구를 다시한번 들여다보라.

조향래(대중문화평론가,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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