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에게, 당 고종은 신라를 정벌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소정방은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형처럼 섬깁니다.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삼국사기)고 답했다. 7세기 말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초강대국인 당을 물리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당시 신라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탁월한 리더십 아래 김유신 장군과 병사,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 반대다. 2021년 입소스‧영국 킹스칼리지 정책연구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91%가 '진보와 보수 간 갈등이 심각하다'는 데 동의했다. 조사 대상 28개국 중 1위였다. 또한 정치적 양극화를 넘어 정서적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우리 국민 10명 중 4명은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식사나 술자리가 불편하다고 느낀다. 20대의 50%는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꺼린다. 단순한 '정쟁'이 아닌 '당쟁'에 진입한 것이다. 조선 당쟁에서도, 당파가 다르면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 살지 않았다. 말씨와 복장도 달랐고, 길흉사에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파를 자손 대대로 세습시켜, 당파가 다르면 서로 원수처럼 여기며 죽였다."(이익, 붕당을 논함)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 역시 극한 진영 대결로 국정이 꽉 막혔다. 지난 7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은 "선거 공약을 120개 국정 과제로 정리해 99개 법안을 제출했는데, 제대로 논의되거나 통과된 게 없다"고 개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태로운 게 안보관의 대립이다. 보수와 진보는 모두 한반도 평화를 주장한다. 그런데 여야 정당의 당헌 2조(목적)를 보면, 더불어민주당은 그냥 '평화'고, 국민의힘은 '진정한 평화'다. 그게 그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민주당은 단지 '평화'만 말하고, 그 구체적 조건은 밝히지 않았다. '통일'이란 말도 없다. 국민의힘은 평화의 구체적 조건으로 한미동맹, 북핵 위협의 제거를 명시했다. 또한 '바람직한 통일', 즉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지향한다. 여야는 한미동맹, 북핵, 통일에서 의견이 다르다.
지난 7월 4일,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2016년 문재인 전 대통령도 "좋은 전쟁보다는 나쁜 평화에 가치를 더 부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걸 보면 그냥 '평화'와 '진정한 평화'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그냥 '평화'에는 더러운 평화도 포함된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더러운 평화를 거부한다. 더러운 평화가 실제 어떤 것인지는 문재인 정부의 안보 정책을 보면 안다.
2021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 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평화, 대화, 비핵화에 대한 의지는 분명히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체제 안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북미 대화를 적극 주선하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북한은 오히려 이런 평화 공세로 시간을 벌며 마침내 핵 무력 완성에 성공했다. 북한 핵은 일차적으로 한국용이다. 2022년 김여정은 "남조선이 우리와 군사적 대결을 선택하는 상황이 온다면 부득이 우리의 핵 전투 무력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김정은은 핵을 방어용이 아닌 대남 선제타격용으로도 쓰겠다는 핵 독트린을 천명했다. "북한은 이제 남한을 적화통일, 즉 남침 대상으로 삼고 있다."(란코프 국민대 교수)
지난 6월 28일, 윤 대통령은 문 정부가 "핵무장을 고도화하는 북한 공산 집단에 대해 유엔 안보리 제재를 풀어 달라고 읍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다"고 비판했다. 이에 문 전 대통령은 "아직도 냉전적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고 응수했다. 하지만 더러운 평화를 추구한 결과 남벌(南伐)의 연옥문이 열렸다. "평화적 수단으로밖에 평화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국가는, 머지않아 다른 국가에게 흡수될 것이다."(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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