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체코 영화제 대상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감독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 잃지 않길"

대구 기반 활동하며 장편 영화 '수성못'으로 주목 받아
자아실현 vs 안정된 가정 고민에서 출발
인간 양면성도 주목…생명이 있는 영화 만들고파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유지영 감독의 이 지난 8일 폐막한 제57회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유지영 감독의 이 지난 8일 폐막한 제57회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프록시마 경쟁(Proxima Competition)' 부문 대상인 '프록시마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제공

유지영 감독. 배주현 기자
유지영 감독. 배주현 기자

10일 동유럽 체코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동유럽의 칸 영화제라 불리는 '제 57회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프록시마 경쟁 부문에서 한국 영화가 대상(그랑프리)을 품에 안으면서다. 작가 '재이'가 신작 출간을 앞두고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며 안정적인 가정을 원하는 남자친구 '건우'와 겪는 갈등을 그린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다. 이는 올해 한국 영화로 유일하게 새로운 경향의 세계 영화를 소개하는 '프록시마 경쟁' 부문에 초청돼 수상의 쾌거까지 이뤘다.

소식이 더욱 반가운 건 본 영화는 대구에서 활동하는 유지영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 2018년 반복되는 실패 속에 갈피를 잃은 20대의 단상을 그린 첫 장편 영화 '수성못'으로 주목을 받은 유 감독이 4년 만에 두 번째 장편 영화로 돌아왔다.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던 유 감독과 수상 당시의 이모저모와 <나의 피투성이 연인> 영화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눠봤다.

▶새벽에 전한 수상 소식

Q. 수상을 예상했나? 시상식 당시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A. 전혀 예상을 못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는 현지에서 통역을 맡아준 가이드는 전날 수상 소식을 미리 들었다고 하더라(웃음). 시상식 당일 나는 프록시마 부문에서 두 작품만 상을 받는 줄 알았다. 이미 두 작품 발표가 나서 시상식이 끝났구나 싶었는데 순식간에 그랑프리 발표가 났다. 화면에 <나의 피투성이 연인> 스틸 컷이 띄어져있어 '뭐지?'하고 보고 있다가 정말 얼떨결에 무대 위에 올라갔다. 수상 소감으로는 함께 해준 스텝과 배우, 감독, 통역가, 가이드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사실 너무 얼떨떨해서 그 시간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고 상패가 굉장히 컸다. '아 이걸 어떻게 한국까지 가져가'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결국 현지에서 캐리어를 하나 사서 망가지지 않게 티셔츠와 양말을 트로피에 둘러서 가져왔다.

Q. 한국에서는 수상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다. 제작지원을 받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측에 곧장 수상 소식을 알렸나?

A. 체코와 한국 시차가 있어서 수상 당시 한국 시간은 새벽 세시 쯤이었다. 너무 기뻐서 피디님께 바로 연락을 드렸고 피디님도 자다가 얼떨결에 소식을 전해 받았다. 애프터 파티를 즐기고 다음날 부모님께 연락 드렸다.

Q. 영화제를 위해 3일날 출국을 했다. 영화제 기간 동안 체코에서 주로 어떤 시간을 보냈나?

A. 다른 나라 영화도 궁금했기에 이런저런 영화도 많이 봤고 배우와 촬영감독님, 스텝들과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했었는데 한국 관객과 관점이 달라서 신선했다. 한국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마치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며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놨었는데 이곳에서는 한국 문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낙태법, 여성 알코홀릭 문제, 채식에 관련된 문화적 차이 등 사회적인 이슈를 많이 묻더라.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유지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유지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 (Birth)'이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인 프록시마 경쟁(Proxima Competition)에 공식 초청됐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제공

▶원하는 일 vs 평온한 삶 공존 가능할까

Q. 영화를 보고 마음이 무거웠던 건 오랜만이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본인의 일에서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결혼 적령기의 30대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영화가 감독님이 실제 가졌던 고민에서 출발한 걸로 알고 있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나?

A. 한 여성으로, 창작자로 꿈을 좇는 자아실현과 일반적이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그 안에서 해야하는 아내와 엄마 노릇이 공존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 역시 그런 고민을 해왔는데 공존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완성할 때는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글을 썼다.

영화 마지막에서는 여전히 글을 쓰는 재이 모습이 나온다. 주인공이 모든 걸 잃게 되지만 자기를 지탱해주는 글 하나만은 남겨놓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원하는 일을 통해 성장하는 것'과 '곁에 있는 사람들과 평온하게 사랑을 공유하는 것'의 공존이 한 시기에 결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걸 잃게 되더라도 자기 자신은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Q. 영화 제목 <나의 피투성이 연인>엔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

A. 좋아하는 작가 고 정미경 작가님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정 작가님의 남편 김병종 화백님이 같은 제목으로 작가님에 대한 추모글을 썼는데 엄청 감동적이었다. 원래 영화 제목은 'Birth' 였다. 심플하게 가고 싶어 'Birth'로 제목을 정했지만 개봉을 준비하면서 한국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제목이 필요하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결정했다.

Q. 영화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제가 주목했던 캐릭터는 재이의 책을 담당하는 출판사 편집장이었다. 내용을 설명하자면, 재이가 편집장에게 임신을 고백하자 편집장은 "축하한다"며 재이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다른 반응을 내비친다. 이어 재이가 "(글 쓰는데 방해될텐데) 걱정 안되냐"고 묻자 편집장은 "작가님이 임신을 해도, 아이를 낳아도 글을 못 쓸 것이라고 생각 안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대사가 재이를 누군가의 아내, 엄마가 아닌 작가로 온전히 바라봐주면서도 한편으론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너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네가 하는 일도 잡아야 된다'다는 어떤 강박이 느껴졌다.

A. 그런 의도로 대사를 넣은 것은 아니다. 편집장은 오히려 보수적인 인물인 셈이다. 편집장의 태도가 바뀌고 싶었던 걸 보여주고 싶었다. 같은 여자임에도 무지로 인해 실례가 되는 말을 내뱉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Q. 영화 내내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은 재이의 욕구가 이기심으로 치부된다. 마찬가지로 건우도 이기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를 원치 않음에도 내 아이를 갖고 싶다고 재이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피투성이 연인> 영화에서 인물들이 이분법적으로 그려지지 않아서 좋았다. 등장인물이 선과 악으로 구별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인간의 양면성'이 나타났다고 보여진다.

A. 주인공도 그렇고 조연 역시 선과 악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편집장이나 재이의 작가 동생 보리 등 모든 인물들이 상황 앞에서 선하거나 악한 모습으로 변한다. 즉 모든 인간은 어떤 상황에 놓이냐에 따라 선할 수도 있지만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주는 태도 변화를 나타내고자 했다.

Q.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떤걸 느끼고 가면 좋겠나?

A. 원하는 일을 통해 성장하는 것'과 '곁에 있는 사람들과 평온하게 사랑을 공유하는 것' 중 뭐가 맞고 틀리다고 할 수 없지만 어떤 상황에 놓여있더라도 자기 자신을 찾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얻었으면 좋겠다. 영화를 보고 시원한 답을 찾을 순 없지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기면 좋겠다.

이미 많은 피드백을 받았다. 30대 남성 관람객 중 '건우'에 공감이 많이 간다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엔 호기롭게 재이와 아이를 책임지겠다던 건우도 얼마나 순진무구했었냐는 것이다. 그런 건우가 안쓰럽게 느껴졌다보다.

Q.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언제 전국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나?

A. 올 11월에 전국 극장 개봉이 계획돼 있다.

Q. 차기작 계획? 앞으로 어떤 영화를 하고 싶나?

A. 그동안 영화에만 몰두해왔기에 잠시 다양한 공부를 해보고 싶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일도 해보고 싶다. 잠시 내공 수련을 하며 자기계발을 한 뒤 차기작을 준비할 예정이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에서 영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있을까'하는 데서 많은 고민을 한다. 외로움과 고립사, 특히 20~40대의 고립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지조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시간이 지나도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영화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혹은 시간이 지나서 의미가 또 재해석될 수 있는 생명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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