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때부터 지금까지 타지에서 생활한 기자는 자취 경력이 꽤나 있다. "스스로 끼니를 챙겨먹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아냐"며 '자취 반대'를 강력히 외치던 엄마의 강력한 뜻은 대학졸업 즈음에 꺾였고, 23살이 돼서야 그토록 바라던 자취 라이프가 시작됐다.
청소년기나, 하숙 생활을 했던 대학생 때나 늘상 엄마나 하숙집 이모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게 익숙했던 터라 요리의 '요'자도 몰랐지만 생각보다 엄마가 그토록 걱정했던 '끼니 챙기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뭐든지 뚝딱 만들어내는 손재주가 좋았다기보다는 인터넷 블로그에는 요리 똥손도 실패하지 않는다던 백종원 레시피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재료만 사와 그대로 만들기만 했을 뿐인데…. 당시 내 요리는 '나', 집에 놀러온 '친구', 지나간 '남자친구'에게 꽤 사랑받았다.
취직 준비로 다른 지역으로 터전을 옮겼을 땐 자취방에 식구가 한 명 더 늘어났다. 친동생과 타지 생활을 하면서 나의 요리 목적은 '동생 챙기기'로 바뀌었다. 내 끼니는 대충 넘어가도 상관없었지만 동생 끼니마저 대충 다룰 순 없어 백종원의 레시피를 손에 놓지 않고 소중한 한끼를 계속 만들어냈다.
따지고 보면 내 요리 안엔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들어있었다. 첫 자취 후 집들이를 오겠다는 친구를 위해 배달음식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만둣국을 대접했고 외국으로 떠난 부모로 홀로 생활을 이어가야 했던 전 연인의 허전함을 달래고자 각종 반찬을 만들었고, 회사 생활에 지쳐 찾아온 단짝 친구를 위해 그가 좋아하는 매콤한 떡볶이를 만들었다.
오히려 나를 위한 누군가의 요리로 위로 받은 적도 많다. 기자 준비생 시절, 또 떨어진 면접 전형에 우울해 방바닥에 퍼질러 있던 나를 위해 남동생이 직접 만들어준 통삼겹살 구이나 최종 합격 뒤 축하한다며 언론고시 메이트가 차려준 따뜻한 밥은 그 자체로 큰 위로가 됐다.
요리는 내게 그런 것이다. 단순 끼니를 때울 용도보단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마음의 집합체. 일본 유명 드라마 <심야식당>처럼 음식 하나에 사랑과 우정과 가족의 사랑과 쉽게 꺼내질 못한 마음 속 깊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런 요리의 매력을 하는 이들은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한국에도 <심야식당>과 같은 곳이 있으면 참 좋을텐데하는….
어딘가엔 있겠지 했지만 실체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한국판 심야식당의 존재를 드디어 알게됐다. 생초면인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밥을 해주는 곳. '요리연구가'까지는 어렵더라도 '요리먹구가' 정도는 될 수 있겠다는 발상으로 요리와 '개더링'(gathering) 관련한 일을 기획하는 닉네임 에리카팕이 운영하는 '카사데리카'다.
이곳에서는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해가는 여성 노동자에게 식사를 차려준다는 특별한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일명 '함바데리카'. 쉽게 말해 여성 노동자를 위한 함바집이다. 에리카팕이 준비한 메뉴는 된장찌개, 골드키위제육볶음, 들기름묵은지무침, 애호박채전과 같은 푸근한 한식 한상차람이다. 이 음식과 함께 유아동 콘텐츠 기획자, 뮤직 크레이터, 공연 티켓 매니저, 노무사 등 다양한 직군의 여성노동자 45명이 어색함을 풀며 밥을 먹고 일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
책은 그중 11명의 여성 노동자와 나눈 대화를 품었다. 대신 잘 지어진 성공담은 없다. 대신 일이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지만 결국 일에서 성과를 내고 보람을 얻는 것이 기쁨인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반짝이는 인사이트가 가득하다. 매일매일 '존버'일지리도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을 맞닥뜨리며 헤쳐 온 이들의 고군분투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대화는 더없이 귀하다.
요리를 한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라는 저자 에리카팕. 책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더해 요리 하나로 진솔한 마음들이 오고간 것을 느낀다면 그걸로도 충분하겠다.
대화집을 보고 있는 누군가는 요리 욕구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꼭 누군가를 위한 요리가 아니어도 괜찮다.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스스로를 위한 요리도 좋다. 그리고 하루 쯤은 이렇게 말해보자. '00아, 밥 먹고 가'. 268쪽,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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