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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수해재민을 구호하라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3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3일 자

'지난 28일부터 31일까지의 4일간 쉴 사이 없이 내린 호우량은 도내 선산군 내의 519 미리(밀리미터)를 필두로 경산지방 439, 군위지방 434.6, 대구지방이 365 미리이며 청송지방 288.5, 영천지방 261 미리였다. 이어 문경 상주지방도 이에 질 바 없는 우량으로 인해 도내 곳곳의 수해는 형용치 못할 심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긴급한 대책이 요망되고 있는 한편 우선 수해 이재민들의 구호 대책에 대해서도 그 만전을 요망하고 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3일 자)

'수해 많기로 유명한 경북도'라는 말이 한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과거에는 지역 앞에 유명 또는 같은 뜻의 명물을 붙여 좋든 싫든 지역의 특색을 드러냈다. 해마다 여름이면 수해로 인해 크고 작은 피해가 잦았음을 알 수 있다. 더위나 사과의 명물 도시로 대구를 표시한 것과 같다. 1948년 여름에도 많은 비가 내려 상주, 김천, 왜관, 경산 등 경북 곳곳이 물에 잠겼다. 대구에서는 신천과 금호강의 제방이 무너져 이재민이 속출했고 전염병도 번졌다. 수재민을 돕기 위한 구호품과 의연금 모금이 뒤따랐다.

한해 전인 1947년에도 홍수 피해가 났다. 그만큼 주민들의 고통은 컸다. 6월 하순부터 한 달 이상 장맛비가 내렸다. 7월 들어서는 하늘에 구멍이 난 듯 폭우가 사흘 동안 쏟아졌다. 인명피해는 물론 가옥과 전답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갔다. 교량과 도로가 유실되고 파괴되어 교통이 끊겼다. 안동, 봉화, 영주 등 경북 북부지역일수록 침수 피해는 컸다. 의성에서는 안계저수지 둑이 무너져 한 해 농사를 망쳤고 주변 농토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그해 여름의 물난리로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실 가옥이 1천 242호에 달했고 6억 원 정도의 재산 피해를 냈다. 경북도와 대구 적십자사가 손을 맞잡고 현장에 나가 10일분의 식량과 임시천막을 설치하는 등 구호 활동을 펼쳤다. 졸지에 삶터를 잃은 이재민이 많다 보니 당국의 힘만으로 이들을 구호하는데 역부족이었다. 사회 각계각층 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했다. 수해재민(수해 이재민)을 구호하자는 모금 운동이 펼쳐졌다.

수재의연금을 모으기 위한 활동은 여기저기서 다양하게 전개됐다. 콩쿨대회 개최 같은 경우는 수재민을 위안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수재의연금 모금에는 민관이 따로일 수 없었다. 제5관구 경찰청(경북경찰청)도 나섰다. 중앙의 예술인들을 초청해 대구공회당에서 공연을 열었다. 이재민을 돕기 위해 입장 찬조금을 받았다. 대동권번 기생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이재민들의 주택건설에 힘을 보태기 위해 대구극장에서 사흘 동안 예능 잔치를 펼쳤다. 10만 원의 기금을 모으는 행사였다. 80여 명의 기생은 거리에서 입장권을 판매하는 열성을 보였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28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28일 자

'40년래의 크나큰 수해로 우리 겨레 수십만의 참화에 비추어 수해대책협의위원회의 거족적인 구호를 호소한데 까지는 좋았거니와 아직도 그 실행 절차까지에는 하세월이 될는지 얘기조차 할 수 없다. 처서를 지나 조석으로 선들거리는 초가을 바람결에 이재민들의 가슴은 벌써 쓰라린 겨울철의 추위에 떨고 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28일 자)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오자 이재민 주거 대책이 급해졌다. 당국은 어려운 동포를 구하자며 세대에 30원씩의 의연금을 거두기로 했다. 빈곤 세대를 제외한다고 했지만 오십보백보였다. 약 1억 원의 의연금을 모아 각 지역에 할당할 계획을 세웠다. 수해 원인과 예방대책도 여러 갈래로 논의됐다. 대구부는 하천 제방 공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또 거리에 산더미같이 쌓인 쓰레기가 수해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왔다. 예산 부족으로 쓰레기를 치우지 못했고 이 쓰레기가 하수도를 막았다는 것이었다. 일주일간 청소주간을 정해 쓰레기를 치우기로 했다.

이재민을 돕는 구호 활동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 '헐벗고 굶주린 창자로 고국을 찾아서 돌아온 우리의 귀환 동포를 구원하자'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이나 강제징용 등에 끌려갔다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 동포를 돕자는 취지였다. 1945년 12월의 경우 대구에 짐을 푼 귀환 동포가 4천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버거웠다. 당국으로서도 준비된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 주민들에게 손을 벌렸다.

대구부는 의연금 모금에 극장을 끌어들였다. 영화는 당시 부민들에게 최고의 오락거리였다. 1947년 3월 한 달 동안 극장을 찾은 입장객은 대구부 인구와 맞먹는 32만 7천여 명이었다. 영화관람자 1인당 1원씩의 의연금을 책정했다. 만경관과 대구키네마구락부, 영락관 등에서 총 11만 5천여 원을 모금했다. 이 밖에 요정에서 술 한 잔 적게 먹고 기녀에 돈 적게 던져주고 연지 화장을 하루 바르지 말자는 권고를 했다. 아낀 돈으로 의연금을 내자는 캠페인이었다.

해방 후 전재민 등의 귀환 동포 구호 운동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 반면 여름철 폭우나 홍수 피해로 인한 수재민 구호는 시시때때로 벌어지고 있다. 재난의 비극은 해가 바뀌어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고 있다.

박창원 계명대 교수
박창원 계명대 교수

박창원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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