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텃밭에서 아이들과 함께 길렀던 감자를 캤습니다. 하얀 감자꽃이 피었던 곳에는 하얀 감자가 주렁주렁 매달려 나왔습니다. 지난 봄, 씨눈이 보이는 감자 조각을 땅에 묻었을 뿐인데 이렇게 감자가 영글었다니, 자연의 신비를 온몸으로 배우게 됩니다. 수확한 감자를 여덟 살 우리 반 아이들과 쪄서 먹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유년의 내 아버지가 문득 보고 싶어집니다.
아버지는 제게 스승이었고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먹는 고구마만 아는 건 고구마를 아는 것이 아니란다. 고구마의 잎, 뿌리, 줄기, 꽃, 새싹과 늙음을 모두 알아야 해. 그래야 고구마를 온전히 아는 거란다."
덕분에 저는 땅콩의 다른 이름이 낙화생(落花生)이라는 것도 낙화생이 꽃이 떨어진 곳에 생기는 열매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땅콩의 노란 꽃은 수정 후 암술 씨방이 자라서 실처럼 변하고 길게 자라 지면을 뚫고 들어가 땅속에서 자란다는 것을 관찰하면서 자랄 수 있었지요. 아버지 덕분에 저는 학교에서 막연히 지식으로 배웠던 지식을 삶과 연결 지으려 애썼고 생태적인 감수성을 가진 초등교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저를 참 예뻐하셨어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마음은 부자였고 부모님으로부터 존중 받으며 자랐어요. 아마도 일곱 살쯤이었을 거에요. 우리 집은 감나무집이라 불릴 만큼 감나무가 많았고 가을이면 떫은 감을 따서 시내 상인들에게 넘겼지요.
"이거 한 접씩 정확하게 센 거 맞지요?" 감을 사러 오신 아저씨의 질문에 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우리 막내딸이 세었으니 틀림없어요."
문틈으로 느껴지던 서늘한 가을바람과 함께 들리던 아버지의 그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린 딸에게 보여준 아버지의 믿음, 저의 선택에 변함없이 응원해주셨던 마음이 저를 키워주었어요. 결혼을 앞둔 제게 일러준 말씀은 요즘도 후배 엄마들에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아이가 물을 뚝뚝 흐르는 체 물걸레를 짜오더라도 절대 아이 보는 앞에서 다시 짜지 마라. 아이가 스스로 하는 일이 가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좋은 부모란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는데...'를 달고 산다고 친구들은 제게 '아버지바라기'라고 하면서 부러워했어요.
대학 3학년 때 경주에서 대구까지 통학을 하였지요. 매일 새벽 아버지는 시외버스정류장까지 자전거로 태워주셨어요. 학교를 마치고 고향 집에 가면 교육, 사랑, 정치, 문화를 주제로 자주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들이 선생으로 살아가는 제 삶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그런 아버지가 저의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딸에게 죽음과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깨달음의 숙제를 던지고 가셨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제 삶의 스승으로 살아계십니다.
곧 여름방학이 옵니다. 칼로 단정하게 연필을 깎아서 필통을 채워주시고 식물 채집도 도와주셨던 내 유년의 아버지, 남자 친구와는 팔짱을 끼지 말고 나란히 손을 잡고 다녀라고 일러주시던 내 청춘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장맛비 잠시 그친 파란 여름 하늘, 흰 구름 저 너머 어딘가에 저를 내려다보고 계실 거에요.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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