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병사는 소모품?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을 이길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종합적 국력에서 일본은 미국에 상대가 안 됐기 때문이다. 현대전은 물량전(物量戰)이고 물량전은 종합적 국력이 승패를 좌우한다. 이런 현실에 일본은 정신력이 물량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정신주의'로 맞섰다.

그 비극적 결과의 하나가 무기 설계의 고의적 '비인간화'였다. 일본의 주력 함상전투기 '제로센'(零戰)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제로센은 선회력과 기동성, 항속거리에서 당시 세계의 모든 전투기를 압도하도록 설계됐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생산하는 항공기 엔진의 출력이 매우 낮았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엔진으로 우수한 선회력과 기동성, 긴 항속거리라는 조건을 충족하려면 기체를 경량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기체의 골조에 구멍을 숭숭 뚫었고 기체의 외피도 얇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제로센은 총탄 몇 발만 맞아도 주익(主翼)이 떨어져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조종사를 보호하기 위한 조종석 뒤와 아래의 장갑과 연료 탱크가 피탄(被彈)됐을 때 폭발을 막아주는 연료 차단 장치도 '생략'했다. 이런 결함은 조종사의 피나는 훈련과 감투 정신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 군부의 지론이었다.

이런 정신주의는 인명 경시의 끝판, '조종사 1명과 전투기 1대로 적함 1척'이라는 가공할 산수(算數)의 자살 공격, 바로 '가미카제'(神風) 특공(特攻)으로 귀결됐다. 이 미친 짓은 베테랑 조종사들을 1회용 '소모품'으로 갈아 넣었을 뿐 패망으로 기운 전세를 되돌리지 못했다. 첫 자살 특공을 성공시킨 세기 유키오(關行男)는 출격 전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상적인 임무라면 폭탄을 떨궈 적 항모 50척을 격멸할 자신이 있다. 나같이 유능한 파일럿을 죽이다니 일본은 끝이다."

경북 예천 수해 지역에서 실종자 수색 작업에 투입,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다 결국 사망한 고(故) 채수근 일병의 비극적 죽음도 '인명 경시'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해병대는 수색에 나선 장병들에게 구명조끼를 지급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는 "젊은 장병들이 아무 때나 가져다 쓰는 싸구려 소모품이냐"는 비판이 쇄도하고 있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 군이 '안전불감증'을 넘어 병사를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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