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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칼럼] 교사라는 이름의 감정노동자

김해용 논설주간
김해용 논설주간

필자가 중학교 시절 있었던 일이다. 까까머리 학생들은 쉬는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 중에도 소란스러웠다. 담임교사는 수업 태도가 불량한 학생들의 이름을 적어서 제출하라고 반장·부반장에게 지시했다. 북한의 5호담당제도 아니고 급우가 급우를 감시하는 일이 빚어졌다. 뒷자리에 앉은 반장·부반장은 매의 눈초리로 급우들을 감시했다.

걸린 사람은 방과 후 청소 등 벌칙이 아니라 벌금을 내야 했다. 가난하던 시절인지라 벌금 내기가 벅찼다. 게다가 반장과 부반장은 공정한 심판이 아니었다. 자기와 친한 학생들은 떠들고 소란을 피워도 눈감아 줬다. 주먹 세고 성질 사나운 학생들 이름도 적지 않았다. 타깃은 키가 작거나 반장·부반장에 줄을 안 선 아이들이었다. 떠든 횟수보다 이름이 더 많이 적혔다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소명 기회도 없이 벌금을 내야 했다. 벌금 낼 돈을 달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어서 부모님 돈에 손을 대는 아이도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벌금을 걷기 시작한 이후 반장과 부반장의 교내 매점 씀씀이가 커졌다. 학생들은 반장과 부반장을 의심했고 담임교사를 원망했다. 반장·부반장은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등장인물 '엄석대'를 연상케 한다. 교사로부터 부여된 역할을 사적 권력인 양 남용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조장한 이는 담임교사였다. 비교육적이고 부당한 일이 자기 학급에서 벌어질 줄 몰랐는지, 알고도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당시만 해도 교권이 서슬 푸르던 시기였다. '아이들은 원래 맞으면서 큰다'는 식의 무지한 인식이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기성세대들이라면 중·고교 시절 교사로부터 폭언 또는 구타를 당하거나 목격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당시 사회는 이런 부조리에 둔감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뀌었다. 학교도 완전히 달라졌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폭언과 구타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대가 됐다. 사랑이란 이름의 훈육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당한 지시에 제자들이 반항을 해도 교사가 어찌할 방법이 없을 정도다.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부터 교사가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도 없다 해도 틀리지 않다. 사회가 학생 인권을 챙기는 사이 교권은 날개 없이 추락했다. 교직은 우리 사회의 감정노동 직군이 됐고, 교권은커녕 교사 인권이라도 보호해 달라는 절규마저 터져 나오고 있다.

최근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에서 20대 여교사가 교실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진상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당 교사가 학부모로부터 악성 민원에 시달려 왔다는 동료 증언이 제기되면서 현장 교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말마저 나온다. 그동안 억눌리고 쌓인 것이 본격적으로 분출되는 양상이다.

교사들이 교권 및 인격권 침해를 호소할 정도라면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이는 국가 미래가 걸린 일일 수 있다. 요즘 교실은 교사에게 권한은 안 주고 너무나 많은 짐을 부여하고 있다. 우선 급한 문제점부터 해결해야 한다. 학부모가 교사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을 금지할 필요가 있다. 학부모 의견은 교내 전담 창구를 통해 수렴하면 된다. 교권 회복을 위한 여러 법안들이 국회에 계류된 채 낮잠 자고 있다는데, 참으로 정치권만 한가하다.

학생 인권과 교권은 상충되는 가치가 아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둘 사이의 절묘한 지점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학생 인권과 교권은 놓쳐서 안 되는 두 마리 토끼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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