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최북단에 위치한 봉화군(奉化郡)은 푸른 영봉의 드높은 기상을 간직한 태백산(太白山)을 비롯하여 청량산(淸凉山), 청옥산(靑玉山), 문수산(文殊山) 등 명산이 품고 있는 지역이다. 태고의 생명력을 고이 간직한 산줄기를 따라 '춘양목'이라 부르는 우람한 금강소나무가 자생하고 있고 청정 자연에서만 서식하는 열목어, 은어 등 동·식물의 보고이다.
봉화 유곡리(酉谷里·닭실마을)는 문수산에서 출발하는 산줄기가 남남,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닭실 마을의 진산인 백설령(白雪嶺)을 세운 후 남서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마을이다. 유곡이란 닭과 관련된 형상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봉화 닭실마을,삼남의 4대 길지로 꼽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경주 양동마을, 안동 내앞마을, 풍산 하회마을과 더불어 닭실마을을 삼남의 4대 길지로 꼽았다. 특히, 가계천과 동막천이 마을 끝자락에서 합수된 후 석천계곡으로 흘러가는데 수구관쇄(水口關鎖)가 교과서처럼 잘 되어 명당 안의 생기(生氣)가 흩어지지 않고 잘 갈무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포란(抱卵)의 형태는 양쪽 날개에 해당하는 산줄기가 있어 둥우리를 감싸주는 모습이 있어야 하나, 이곳의 경우에는 남으로 내려오던 백설령이 남서쪽으로 한맥을 떨어뜨리고 여맥(餘脈)은 동(東)으로 흘러 두 개의 봉우리를 분화시킨 형태이다. 종택이 마을 중앙에 입지하지 않고, 서쪽으로 치우쳐 입지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형상을 감안한다면 닭이 알을 품는 포란 형상이라기보다는 알을 낳는 형상, 즉 금계출란형(金鷄出卵形)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닭의 형상은 방위에 따라 금계, 청계(靑鷄), 적계(赤鷄), 황계(黃鷄), 백계(白鷄), 오골계(烏骨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곳의 주 혈처인 종택(宗宅)은 축좌(丑坐)로 축은 사유축(巳酉丑) 금국(金局)이라 금계인 것이다.
예로부터 '닭은 새벽의 어둠을 뚫고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울음소리는 하늘과 인간세계를 이어주는 길조'라고 여기며, 닭은 한번 알을 품으면 많은 병아리를 부화시키기 때문에 대대로 많은 자손을 번식하고, 붉은 볏은 벼슬이 높아지고 축복을 뜻하기도 한다. 안산은 횃대, 동쪽에는 수탉이 울고 있는 형상의 옥적봉(玉笛峰), 종택 앞 논 가운데 닭이 먹이를 찾는 형상의 바위 등 닭과 관련된 형상이 곳곳에 있다.

닭실마을의 원래 입구 너럭바위에는 한자 초서로 '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는 네 글자가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다. 권벌의 5대손 권두응(權斗應)의 글씨다. 절경을 이루는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가 어우러진 신선들이 노닐던 별천지를 의미한다. 충재 종택 경역 내에 자리하고 있는 청암정(靑巖亭)은 연못 한가운데 놓인 거북형태의 커다란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석천계곡의 석천정(石泉亭) 등과 함께 현재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안동 권씨 집성촌
닭실마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크게 활약했던 충재 권벌(權橃·1478~1548)이 기묘사화 때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안동 권씨 집성촌을 이뤘고 그의 후손이 지금까지 전통을 지키며 대대로 살고 있다. 500년간 지속되었던 마을인 만큼 이곳에는 의미 있는 유물과 사적지들이 많이 있다.
그의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沖齋),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성균관 생원 사빈(士彬)의 둘째 아들이다.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참판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그는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정면으로 대응했던 인물이다. 1520년 관직에 올라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고 이후 다시 복직되었으나 을사사화 연장으로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으로 평안도(平安道) 삭주(朔州)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삶을 마치게 된다.
충재 권벌은 사후 억울함이 밝혀져 영의정에 추증될 정도의 최고위 관료였고, 불천위(不遷位)에 선정된 진정한 선비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이 마을이 '충절세향(忠節世鄕)'으로 불리는 까닭은 그가 보여주었던 신념과 올곧음 때문이다.

닭실 안동권씨 가문은 권두경(權斗經), 권두인(權斗寅) 등 두(斗)자 돌림을 쓴 권벌의 5대손 때에 와서 전성기를 맞는다. 문과급제자 16인, 소과 합격자 59인, 참판 2인, 방백 수령 12인, 의병장 3인을 비롯하여 문집과 유고를 남긴 이가 90여 명에 이른다. 특히 주옥같은 시 300편을 남긴 권벌의 증손 권상원(權尙遠)과 아우 권상명(權尙明), 그리고 이른바 28두(斗)로 불리는 충재의 5대손 28인은 필명을 날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렇듯 많은 인물이 나온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조상의 음덕이 뒷받침되어야
일반적으로 한 가문이 번성하는 데에는 닭실마을처럼 양택 명당도 인연이 되어야 하지만 조상의 음택 명당을 통한 음덕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진 유곡리 중마을 산록에 있는 충재의 묘소를 둘러본다. 묘소 아래에는 그의 일생을 정리한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곳 산록에는 상하 총 5기의 묘소가 있다. 최상단에 장자 권동보(權東輔) 묘소, 그 아래에 며느리 밀양 박씨, 다음으로 모친 파평 윤씨, 그 아래 부친 권사빈, 마지막에 충재 부부의 합폄 묘소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산줄기가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다. 산줄기가 갈지(之) 자 모양으로 흘러내린다. 이 형상을 구기자 열매가 달린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이를 풍수에서는 기재지혈(杞梓枝穴)이라 부른다. 이러한 혈은 약간의 결함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럼 이곳의 핵심 혈처는 어디일까. 혈처에 근접한 묘소는 충재 부부 합폄 묘소와 장자 권동보 묘소, 며느리 밀양박씨 묘소이다. 이중 충재 부부와 장자 묘소는 간좌(艮坐)의 명당터인데 축좌(丑坐)로 놓은 점이 아쉽다. 지가서에 간좌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배출된다는 좋은 좌로 알려져 있다. 경주 양동마을의 송첨종택 서백당(書百堂), 영천 임고면 매산고택(梅山古宅), 영양 주실마을의 호은종택(壺隱宗宅) 등이 간좌이다.
며느리 밀양박씨는 계좌(癸坐)로 이곳 묘소 중에서 가장 잘 모신 것으로 판단한다. 조안산이 가장 화려하며 자리가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만 놓고 본다면 옥녀직금형이다. 조안산은 도투마리, 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녀직금형은 옥녀가 비단을 짜듯 귀한 인물이 끊임없이 배출된다고 하는 형국이다. 이를 감안하면 이 집안의 번성은 이곳 음택 명당 기운이 한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충재 권벌은 이 시대에 재조명되어야 할 잊어서는 안 될 큰 인물이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절개를 지녔다. 특정 세력에 얽매이거나 이익을 위해 의를 버리지 않았으며 올바른 시각으로 정국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의리와 명분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지켜가야 할 소중한 가치관이다.

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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