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 한·미 정상은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공동선언을 하였다. 그동안 포로 송환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은 정전협정으로 이미 종결되었다는 입장이었으나, 2023년 7월 현재 우리 품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80명이며 이중 13명이 생존해 있다.
이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동안 북한 주장과는 달리 국군포로들은 공개 처형되거나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며 강제 편입되었고 전후에는 탄광 등 험지에 배치되어 그 가족과 후손들까지 사회적 차별과 학대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군포로가 얼마나 더 북한에 생존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회담 당시 포로 송환 협상이 어떠했는지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혀 보자.
◆포로 송환 방식 달라
1951년 11월, 지상에서의 군사분계선이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자 포로 송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양측의 입장은 매우 첨예하였다. 유엔군 측은 자유 송환 원칙을 제시하였고 공산군 측은 전체 교환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유엔군 측 역시 전체 교환이나 동수 교환 등을 생각했으나 전쟁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이는 강제 송환의 성격이 강하여 '자유 송환이야말로 인도주의 정신에 합당하다'고 본 것이다.
공산군 측이 거부한 이유는 제네바협정에 자유 송환이라는 원칙이 없다는 것이나, 실제로는 포로에 대한 비인도적인 관리 실태와, 만약 이들이 '귀환을 거부할 경우 받게 될 국제적 책임은 물론 체제 선전에 악영향'을 심히 우려한 때문이다.
양측이 발표한 포로의 현황에 큰 차이가 있었다. 유엔군 측은 13만2천 명을 수용하고 있다고 발표한 반면 공산군 측은 1만1천559명의 명부를 제시하였다. 유엔군 측은 공산군 측이 내놓은 포로 현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유엔군 측은 한국군 행방불명자 8만8천여 명을 포함하여 적어도 10만 명 정도의 포로가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실제 공산군 측은 전쟁 발발 이후 9개월쯤 되는 시점에 6만5천363명의 포로를 획득했다고 자랑삼아 선전을 한 적도 있었기에, 공산군 측의 자료는 더더욱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전체 교환 방식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유엔군 측은 강한 이의를 제기하며 포로에 대한 처우·학살·강제 편입 등의 문제를 들어, 국제적십자사에 의한 상호 포로수용소 방문 조사를 제의하였지만 공산군 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포로 관리 실태를 빌미로 염탐하려 한다는 이유였다. 또한 자유 송환 방식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려는 술책이라며 시종 비난하였다. 한편 유엔군 측은 내부적으로 귀환 거부 포로를 파악하였는데, 대략 2만8천 명 내외가 될 것으로 보고 공산군 측에 자유 송환을 하더라도 최소 10만 명 정도는 돌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절반에 해당하는 6만6천 명을 실사해 보니 60% 이상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5만7천600여 명 자유의 땅 밟아
이는 전혀 뜻밖이었다. 이 수치대로라면 공산군 측의 기대치에 못 미쳐 자칫 협상에 차질이 우려되었다. 공산군 측은 유엔군 측의 심사라는 것은 강제 심사여서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며 심사 거부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심사를 하지 않은 수용소에서는 폭동이 예견되었다. 인명 피해를 막고 협상을 성사시키려는 유엔군 측은 마침내 심사를 중단하게 된다. 공산군 측의 억지 협박에 기대성 사고가 잘못 작동한 결과라 보면 아쉬움이 적지 않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회담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공산군 측은 자유 송환 원칙을 받아들일 테니 대신 '비행장 건설'을 수용하라고 주장했다. 그간 유엔군 측은 '비행장 건설'을 절대 열세에 있는 공군력을 증강하려는 것으로 인식하여 거부해 왔던 것이나, 자유 송환 방식을 관철하기 위해 '비군사용 비행장'으로 제한하여 수용하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유엔군 측은 8만2천493명을, 공산군 측은 1만3천444명을 송환하였다.
그나마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반공포로 3만5천여 명(민간인 제외)이 석방되어 모두 5만7천600여 명이 자유의 땅을 밟게 되었다. 근 15개월간의 협상 과정에서 전선 지역에서는 12만5천 명 이상의 전사상자(공산군 측 제외)가 발생했으니 매우 비싼 대가가 따른 협상이다. 어린 나이에 강제 억류된 국군포로의 비참한 실상은 1994년 고 조창호 중위가 귀환해서야 겨우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지역별 포로수용소 간에는 모종의 지휘 체계가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포로들 간에는 사상 교육이 강화되었고, 자유 송환을 막고 반공포로를 억압 감시했으며 심지어 살해하기도 했다. 1952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수용소 소장을 유인하여 구금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엔군 측은 즉각 실력 행사를 선포하고 전차로 증강된 부대를 급파하며 거제도를 포위하였다.
포로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용소 소장에게 19개 죄목을 덮어씌워 인민재판에 회부한 다음,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유 송환 철회, 강제 심사 중지 등을 제시하고 포로 학대 등을 거짓 진술케 하였다. 이들의 요구는 분명히 회담장에서 공산군 측이 집요하게 주장하는 것들이었다. 수용소 안팎에서 모종의 지휘 체계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엔군 측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포로들은 1950년 9월 투항한 이모 대좌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의 투항은 포로수용소를 장악하기 위한 셈이었다.
◆미완의 국군포로 문제 해결돼야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사건, 1952년 2월 협상이 한창이던 무렵, 공산군 측은 있지도 않은 독가스 살포, 생체실험 등 소동을 벌였다. 미군이 자백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세균전' 뉴스는 발 빠르게 국제사회로 파급되었으나 이 소동으로 긴장한 쪽은 오히려 유엔군 측이었다. 공산군 측이 세균전을 강행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유엔군 측은 국제적십자위원회와 세계보건기구에 진상 조사를 의뢰하였으나 공산군 측은 극구 불응하였다. 결국 이는 북한 지역에서 발생한 콜레라 등에 대한 자체 방역의 허점을 감추기 위한 연극이자, 자유 송환을 주장하는 유엔군 측에 비인도적 이미지를 덧씌워 협상을 주도하려는 전형적인 선동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70년 전 정전회담을 회고해 보면 유엔군 측에서는 진지한 회담 그 자체였으나 공산군 측에 있어 회담이란 진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인간조차 수단화'하는 또 다른 전쟁일 뿐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통일부라 하지만 그들은 통일전선부라 하지 않는가.
비단 표현상의 차이만이 아님을 유념하자. 국군포로에 대한 인권 문제는 2021년 3월 제46차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처음 채택되었고 올 4월 제52차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국군포로는 물론, 북한의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의 반인권·반문명적 독소를 시정할 것을 결의했다. 미완의 국군포로 문제가 하루라도 빨리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윤광섭 예비역 육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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