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운데 시든 파초가 우뚝하고, 막돌로 괴어 놓은 나지막한 돌 탁자가 그 뒤로 보인다. 탁자 위에는 고금(古琴)이 하나, 두루마리가 세 축, 첩이 두 권, 몽당 먹이 놓인 동그란 벼루, 붉은 소반의 크고 작은 찻잔이 셋이다. 쌍상투 튼 동자가 다로(茶爐) 앞에서 부채질을 한다. 동그란 불부채가 정겹다. 탁자 옆에는 사슴 한 마리.
사슴을 벗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과 글씨를 펼쳐보며, 시를 짓고, 차를 마시는 누군가의 여유로운 일상에 대한 부러움이 무럭무럭 솟는 광경이다. 고인일사(高人逸士)든 아사귀인(雅士貴人)이든 마땅히 있어야할 주인공이 없다. 누구의 뜰일까?
화원을 경영하고, 원예를 취미로 삼으며 관련 글을 짓는 일이 18-19세기 조선의 양반사대부들 사이에서 문화적 현상을 이루었다. 한양도성 내에도 명원(名園)이 여럿 있어서 구경을 다니며 정원 감상을 글로 남겼다.
예를 들면 정조 때 명재상 채제공은 도성 안팎의 화원을 두루 유람하고 '우화재기(寓花齋記)', '공회정기(公會亭記)', '조원기(曺園記)', '중유조원기(重遊曹園記)', '유오원기(遊吳園記)', '유이원기(遊李園記)',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 등을 남겼고 성대중, 이용휴, 이가환, 정약용, 남공철 등도 원기(園記)를 지었다.
마음속의, 머릿속의 정원인 심원(心園), 의원(意園)을 글로 경영하는 의원기(意園記)도 있었다. 당장 실현하긴 어렵지만 나의 정원, 내가 살고 싶은 곳인 나만의 장소를 상상하며 설계한 글이다. 의원기는 현실과 자아의 간격 속에서도 나의 의식이, 나의 생각이 지금여기에 속박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을 것 같다. 주인이 그려지지 않은 '초원시명'은 혹 누군가가 꿈꾸었던 의원을 그린 의원도(意園圖)일까? 이상적 주거의 조경 식물로 파초가 빠지지 않았다.
안평대군, 양산보 등 꽃과 나무에 정을 붙여 아름다운 원림을 가꾼 예는 15-16세기에도 있었고, 퇴계 이황도 매화동산을 가꾸고 매화시집을 따로 엮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화훼는 자연의 조화를 체득하거나 수신을 기탁하는 매개체라기보다 식물 자체가 주는 기쁨을 향유하는 생활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앞 시대와 다르다.
"시명(試茗) 단원(檀園)"으로 쓰고 '김홍도' 인장을 찍었다. "차를 맛본다"는 제목대로 이 그림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차 마시기다. 음악, 미술, 문학의 교양을 쌓기는 쉽지 않아도 차는 누구나 기쁘게 마신다. 홀로의 수행과 수양에도, 정담을 나누는 교류와 소통에도 차는 긴요하다. 파초잎 드리운 정원이라면, 예술이 함께 한다면 더욱 운치 있는 일이다. 차든 커피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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