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는 근원을 돌아보게 한다. 나도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처럼 참된 신앙에 이르기 위해 수도승적 삶을 곱씹으며 이 여정을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든 신앙은 그저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살아 있는 역사적, 문화적 현상이다.
아인지델른 수도원 가는 길에는 알프스의 높은 산과 깊은 계곡, 그 아래 바다 같이 넓은 호수가 있었다. 남부 독일 보덴 호수에 인접한 중세 종교도시, 콘스탄츠를 지나 수도원이 가까워지자 저 멀리 취리히가 보이는 것 같았다. 콘스탄츠와 취리히, 두 도시를 떠올리자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알프스의 고독을 한 몸에 품은 수도원
콘스탄츠는 중세에 유명한 종교 도시. 이곳에서 1414년부터 1418년까지 16번째 중세 최대의 공의회가 열려 난립한 교황의 문제를 해결하고,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를 화형에 처하고, 위클리프를 파문했다. 그리고 취리히는 아인지델른의 사제였던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1519년 1월 1일 스위스 땅에서는 처음으로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곳이지 않는가.
아인지델른 수도원을 향하는 길에 뜻밖의 생각들이 나를 뒤흔들었다. 수도원 여정에 들려오는 개혁자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나단 스미스의 말이 생각났다. "지도는 실제의 영토(땅)와 같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지도뿐이다."
오늘날에도 순례객들이 밀려드는 아인지델른 수도원, 중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고 아름다운 동네를 상상하며 그곳을 향했다. 예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아인지델른은 상가, 호텔, 레스토랑, 은행 등이 빽빽하게 들어선 작은 상업도시였다. 이런 풍경을 뒤로하고 남서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내준 알프스 산을 향하자 눈 앞에 수도원이 서 있었다. 바로크 풍의 수도원 교회, 거대한 쌍둥이 탑이 우리를 맞이했다. 알프스의 고독을 한 몸에 품은 수도원은 아인지델른 모든 마을을 압도할 만큼 웅장하고, 거대했다.
아인지델른 수도원과 마을 사이에는 광장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다. 비스듬히 굽은 작은 광장 하나가 전부인데, 수도원과 마을은 완전히 분리된 공간 같았다. 한쪽은 영적인 공간이고, 다른 한쪽은 세속의 공간이었다. 작은 광장 하나가 만들어 내는 이 놀라운 현상이 그저 신비할 뿐이었다.
◆수도승은 기도와 묵상이 노동
수도원의 규모 때문인지 며칠간 머물 숙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도원을 두 바퀴쯤 돈 후에야 겨우 순례자 숙소를 발견했지만 어디서 예약을 확인하고, 숙소키를 받아야할지 막막했다. 다른 순례자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담당 직원을 만나 예약을 확인하고, 숙소를 배정 받았다.
웅장한 아인지델른 수도원은 바로크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아인지델른 수도원의 첫 교회는 987년에 세워졌고,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지만 완성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수도원은 1704년에서 1719년 사이 수도원장을 지냈던 마우러스 폰 롤(Maurus von Roll)이 재건축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이 완성되기 까지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려, 화재를 6번이나 겪을 정도로 험난한 세월을 보낸 후, 1911년이 되어서야 완공되었다. 수도원은 폭이 136m, 길이 156m의 직사각형 형태인데, 그 가운데 교회를 세웠다. 수도원은 4개의 안뜰을 품었고, 수도원 교회 안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은혜의 예배당(Gnadenkapelle)인 알퇴툉의 성모 마리아 채플이 있는데, 이곳이 바이에른의 국가적 성지로 유명하다.
아인지델른의 거대한 구조물의 특징은 선과 형태의 단순함인 것 같았다. 수도원 창문과 문은 몰딩 없이 단순한 규칙을 따르듯 서로 연결돼 있고. 수도원 정면과 탑을 제외한 다른 면은 거의 장식이 없을 정도로 담박하다. 두 개의 탑 사이에 있는 정면의 모습도 모델로 삼았던 잘츠부르크와 와인가튼의 수도원 보다 정적이다. 아인지델른 수도원은 이곳의 수도승들이 추구한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18세기 수도원장 마우러스는 수도승들에게 '좋은 훈련의 장'을 만들어 주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으로 수도원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그래서 이곳은 일찍이 진정한 베네딕트의 삶을 실천하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그래서 수도승들에게는 기도와 묵상(렉시오 디비나)이 노동이었고, 노동이 곧 기도와 묵상이 되었다. 이들은 오롯이 한 곳에 집중했던 것이다.이것이 곧 아인지델른 땅을 처음 밟은 성 마인라드(St. Meinrad)의 영성이었다.
◆마인라드가 기도하던 아인지델른 수도원
마인라드는 일생 동안 베네딕트 규칙에 기재된 수도승의 삶을 실천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에게 수도원은 '홀로 사는 삶(독거)을 훈련하는 학교'요, '하나님께 봉사하는 학교'였다. 수도승은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베네딕트 규칙 그대로의 삶이었다.
마인라드는 원래 보덴 호수 속 작은 섬 라이헤나우(Reichenau)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 그는 수도승이었지만 성서학자였고, 수도원의 사제였고, 라이헤나우 수도원장의 조카이기도 했다. 그는 '홀로 기도'와 '성경 묵상'에 전념하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 알프스의 깊은 숲 속으로 칩거하였다. 수도원을 떠나 에첼베르크(Etzelberg)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더 깊은 산 속 아인지델른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25년 동안 '독거(solitude)'와 '회개(penance)'의 삶을 살았다. 마인라드가 기도하던 그곳에 지금 아인지델른 수도원이 서 있고, 그의 제자들은 그의 길을 걷고 있다. 아인지델른 수도원도 역사의 질곡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전쟁,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프랑스 혁명의 여파 속에도 아인지델른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이렇게 수도원을 돌아보고, 수도원에 담긴 역사를 뒤적이며 하루를 보냈다. 짧은 저녁기도를 마치고 내일 새벽을 준비했다. 수도원에서 머묾은 수도생활의 체험이다. 우리의 여정의 성공과 실패는 수도승들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켰지만 새벽 기도회 장소를 찾는 게 숙제였다.
어제 저녁 수도승의 안내가 있었지만 우리는 미로 같은 수도원 2층 공간을 이리 저리 돌다 겨우 기도실로 들어갔다. 아침 기도실은 수도원 교회당 2층의 작은 예배당이었다. 이곳에 생활하는 수도승이 약 50명은 된다는데, 아침 기도회는 10여 명의 방문객과 20여 명의 수도승이 전부였다. 새벽임에도 한결 같은 모습으로 예배에 임하는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승들의 모습에 마음이 빼앗겼다.
◆순례자들 발길 이어져
아인지델른의 아침은 역동적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도원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도원 교회 안은 하나, 둘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사람, 천장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를 올려다보는 사람, 성인들의 조각 앞에 서 있는 사람. 그러나 단연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것은 검은 머리 마리아상이었다. 원래는 참피나무로 조각되었지만 촛불에 거슬러 검은색으로 변한 마리아상이었다. 우리 앞에 서 있는 마리아상, 단지 검은 손과 검은 얼굴만 내밀었지만 화려한 옷과 치장 때문인지 검은색이 유독 도드라졌다.
아침이 되자 이곳이 유럽의 중요한 순례지인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개별 순례자, 가족이 함께 온 순례자, 단체 순례자 등 다양한 순례자들이 줄을 이었다. 14세기부터 아인지델른은 유럽에서 중요한 순례지였다. 1466년에 이곳에만 약 13만 명의 순례자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 후 18세기까지 그 수가 줄지 않았으며 오늘날도 꾸준히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이곳을 찾은 수많은 명사 가운데는 괴테(Goethe)가 끼여 있었다. 그는 두 번이나 이곳을 방문한 한 후, 이렇게 회고했다.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진정한 예배당은 어디서도 본적 없는 새로움이었다.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빛은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깊은 묵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떻든 아인지델른의 한 성인의 강인한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사랑과 빛이 오늘 우리 인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성인 마인라드'는 순교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머물며 기도했던 아인지델른에는 많은 흔적이 남아있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아인지델른의 사제였지만 종교개혁의 길에 나셨고, 괴테는 아인지델른에서 인류를 향한 '사랑과 빛'을 발견했다. 나는 사흘 동한 그곳에 머물렀다. 아인지델른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고, 나는 무엇을 남기며 살 것인가. 역시 수도원은 묵상의 공간이었다.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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