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14>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자연에서 깨달은 미학적 소명

이경규 계명대 교수

겨울철 열차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겨울철 열차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젊은 날의 초상'은 이문열의 초기 작품으로 자전적 색채가 강한 성장소설이다. 이 소설은 젊은 작가의 문학적 출사표를 겸하고 있다. 그것은 이념이나 도덕으로 고취된 것이 아니라 미학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다. 설산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체험한 주인공은 미적 창조를 자신의 직업이 될 것으로 예감한다. 이 소설의 서사는 이 예감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복무한다.

주인공 영훈은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통과하고 S대에 들어간 수재다. 그는 학과 공부에 만족하지 못하고 독서와 동아리 토론을 통해 방대한 지식과 교양을 쌓는다. 2학년을 못 마치고 중퇴할 때까지 읽은 책이 천 권에 이른다. 영훈의 참을 수 없는 지적 욕구는 삶의 궁극적인 근거를 얻겠다는 욕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知의 축적이 깨달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학문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라고 영훈은 술회한다.

영훈은 공부 대신 고행에 투신한다. 시골 술집의 잡일꾼이 되어 극심한 노동으로 육신에 혹사를 가한다. 이마의 땀방울이 인식의 결정체로 승화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물론 기대는 충족되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영훈은 치사량을 초과하는 독약을 품고 다닌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삶을 바다에 한 번 조회해보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눈보라 치는 늦겨울, 영훈은 동해에 이르는 이백 리 길을 걷는다. 도중에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자연과의 조우다. 영훈은 눈 덮인 창수령을 넘으며 일생일대의 미적 환희를 경험한다.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오,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이 설산의 미적 감격은 바다에서 구체적인 방향성을 띤다. 영훈은 바다에 발을 담근 채 바다의 교시를 기다린다. 파도가 밀려와 그를 넘어뜨리고 물속으로 끌고 간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내면에서 강력한 생의 에너지가 분출한다.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느껴지는 바닷물의 유혹에도 내 모든 근육은 힘을 다해 나를 모래사장으로 끌어내었다. 그리고 한순간의 위기에 자극된 생명력은 갑작스러운 불꽃으로 내 의식을 타오르게 하였다.

이렇게 설산의 미적 충격을 거쳐 파도의 세례를 받고 영훈의 절망과 허무는 치유된다. 그는 자신의 긴 방황을 '설익은 감상'으로 정리하고 생활세계로 복귀한다. 학문으로도 고행으로도 얻지 못한 삶의 근거를 자연에서 얻은 것이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자연만큼 生을 약동케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평생 추구할 미학적 미션까지 제시한다. "언제부터 나를 사로잡고 있는 예감 중의 하나는 내가 어떤 예술적인 것 ㅡ 아름다움의 창조와 관련 있는 삶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늦겨울, 상행선 열차에 몸을 실은 영훈의 눈에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필 봄"을 약속하며 망울진 복숭아나무가 차창을 지나간다. 이념과 도덕이 세상을 주도하던 시대에(70년대 말∼80년대 초) 자연 미학에 근거하여 문학적 출사표를 던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