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의 인세이셔블 연극리뷰] 유통기한 없는 부부의 사랑으로 그려내는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었나>

◆'이혼해도 좋아, 100세 시대도 좋아. 사랑만큼은 온전한 웨딩케이크니까'

졸혼도 유행처럼 되어 버린 시대다. 통계청 발표로는 평균 초혼 연령은 남자 33.7세, 여자 31.3세로 부부 1,000쌍 중 2쌍이 이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만혼(晩婚) 부부도 많다. 인구절벽 시대에 출산율은 높아지고 행복 지수가 올라가면 더한 대한민국 경사가 있을까. 극단 전망의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김나영 작, 심영민 연출, 드림시어터)는 이혼한 사십 대 부부와 사십 평생 티격태격 살아온 노부부의 웨딩케이크 이야기를 잔잔한 파도처럼 들춰내면서도 사랑의 진동은 찐하다. <표류하는 너를 위하여>(1990, 정복근 작, 심재찬 연출)로 창단공연을 한 뒤 쉼 없이 작품을 발표해 온 극단 전망이 오랜만에 인천시립극단 배우 심영민이 연출하고 성우로 활동하는 손종환이 기획한 공연으로 돌아왔다. 잔잔한 희곡과 배우들의 연기로만 승부수를 띄우고 소극장 연극에 순풍(順風)을 몰고 왔다는 점에서 관객의 후한 점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까지 장르와 공연형식은 다양화되고 동시대성으로 전복시키는 연출, 자극적 소재, 장르 혼종(混種)의 연극성 시대에,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는 연극의 미적 감각이 극 중 인물로 분하고 살아가는 배우예술임을 확인시켜 주는 공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희곡의 극적 서사를 드라마틱하게 각인시켜 주고 허구의 집에서 살아가는 인물을 현실 연기로 투사하는 것은 배우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연극은 AI와 디지털 시대에 배우로 이야기를 채워가는 아날로그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첨단기술이 연극의 일부로 생활화 되었다 해도, 연출의 과도한 기술과 재료, 무대의 거추장스러운 설정과 오브제들로 채워진 무대가 인간의 짠한 감동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는 70분 동안 불필요한 것들은 거둬내고 벤치와 소품 몇 개, 배우들의 연기로만 연극적인 형식을 갖추고 '짠'하고 '찐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 김나영 작, 심영민 연출의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 배우화술과 연기로 온전한 웨딩케이크의 맛을 만들어내.

소극장 무대는 볼품이 없어도 두 부부가 각각 살아가는 공간으로 충분하다. 나무 벤치 의자가 보이고 조명 사이로 나무 몇 개를 올려놓아도 공원임을 짐작하는데 충분하다.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되어 보이는 세로 배너 현수막은 공원이 되고, 거리로 변주되는 배경으로도 손색이 없다. 연극은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40대 부부 이야기'는 다른 삶의 방식을 지지하며 '쿨'하게 살아가는 이혼 부부의 에피소드다. 증권맨인 남편의 사랑은 아내를 위하고 하나뿐인 자식을 걱정하지만, 남남이 되어 살아가는 이야기다. 공원에서 만난 남편 주현(조주현 분)과 아내 김영(박선신 분)은 3년 전 이혼했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보내고 여전히 사랑이 넘친다. 살림 걱정, 자식 걱정, 가족의 미래까지, 이혼 전보다 더 걱정하며 밀회를 즐기고 뜨거운 사랑의 전류가 흐르는 두 사람이다.

아내는 한때 미술계 신인으로 화단(畫壇)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대작 논란에 휩싸여 미술계를 떠나면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10년 전 아내가 갤러리에 전시한 그림은 경비아저씨가 그려준 <동그라미>였다. 자궁 회귀 본능적 예술, 작가의 아이덴티티의 예술로 미술계 주목을 받았으나, "김영의 동그라미, 사기인가 예술인가?" 의 논쟁에 휘말려 대작 논란으로 미술계를 떠나야 했다. 아내의 미술계 사건은 대법원 무죄 판결이 내려진 가수 조영남의 대작 논란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아내는 당당하다. "사고라니. 그건 의도한 일이야.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난 갤러리 경비 아저씨의 동그라미를 전시할 거야 (중략) 난 후회 없어. 허세와 가식 빼면 아무것도 없는 미술계 떠난 거"라고 말하고, " 젊은 화가 김영까지 완전히 폐기됐지. 독특한 상상력의 세계를 발칙한 화풍으로 표현하던 전도유망한 화가"라는 말로 아내를 지원하는 남편이다. 아내의 내면은 그림을 그리던 아이의 마음으로 남편 사랑이 필요한 철없는 아내이다.

아내 마음을 치유해 주고 싶은 남편의 대화가 이어질 때쯤 이혼도 아내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남편은 폐암 4기라는 고백을 하고 무대는 헛헛한 삶이 섞어지는 감정으로 먹먹해진다. 마지막 인생도 가족을 위한 버킷리스트다. 월세를 받을 수 있는 6층 건물 계획을 털어놓고 이혼도 아내의 치료를 위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면서 연극은 짠한 감정을 섞는다. 죽음을 얘기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며 웃는 부부의 장면에서는 잘려 나간 웨딩케이크라도 사랑만큼은 온전한 케이크로 되돌아 마음의 사랑을 열게 만든다. 여전히 사랑하는 부부로 평생을 살아가고 싶어 하는 애틋한 사랑의 전류가 무대로 채워지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했다"라는 유명한 예술인의 말이 떠오른다. 이혼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남이 되는 시대에 잘려 나간 웨딩케이크 한 조각은 이들 중년 부부에게는 오히려 애틋한 사랑으로 채워지는 온전한 케이크이다.

두 번째는 45년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의 에피소드다. 푹푹 찌는 날씨에 아내 성화에 못 이겨 인근 공원으로 나온 둘만의 소풍으로 시작된다. 아내 안혜숙(홍윤희 분)의 말투를 타박하는 남편 최장수(김종칠 분)은 아내의 투박하고 무뚝뚝한 태도가 못마땅하다. 하지만 남편을 끔찍이 위하는 아내다. 더운 날씨에 소풍은 웬 소풍이냐며 아내를 타박하고 투덜거려도 김밥 한 잎에 마음이 녹아내리고, 아내는 "나니까 짠돌이 남편, 투덜거리는 영감 소리 다 받아주는 거야" 라며 즐거워한다. 남편 시비도 웃고 받아내며 사과를 깎아 입에 넣어주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연극이 이렇게 흘러만 가면 싱거워서일까. 작가는 아내가 35년 전 싱크대 앞에서 자신을 심쿵하게 만들었던 한 남자와의 비밀을 털어놓게 한다. 70대 남편은 "어떤 놈이야." 하며 '이놈 저놈' 씩씩거리며 청춘 시절 남자로 돌아간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노부부를 순수한 사랑의 감정만큼은 잘려 나가지 않은 '웨딩케이크'로 던져 놓는다. 그 어떤 인생 태클로 45년을 지켜낸 웨딩케이크가 녹아내려도 이들의 사랑과 믿음은 변함이 없고 아내의 고백으로 더 애틋해지는 부부다.

노부부의 김종칠, 홍윤희는 극 중 인물의 삶과 인생 자체이고 중년부부 박선신과 조주현도 연기로만 그려내는 두 부부의 삶을 아프고 짠하게 전달한다.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 의 케이크는 인생이고 삶의 시간이다. 한 조각 잘리고, 변해 버린 인생의 웨딩케이크이면서도 삶과 인생, 사랑에는 유통기간이 없는 온전한 케이크이다. <내 웨딩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의 노부부 에피소드는 배우의 연기와 화술만으로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의 표본이 되었다. 무엇보다 김종칠 배우의 연륜이 극 중 인물 그대로 녹아내린다. 심영민 연출은 배우들 연기의 선율을 무대로 조율해 내면서 70분 동안 웃고 짠한 무대를 만들었다. 인생을 한 수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배우들의 연기 때문이다. 손종환 기획 프로듀서는 "기회가 된다면 웨딩케이크를 들고 전국 공연을 다니고 싶을 정도로 요즘 시대에 딱 맞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극단을 창단했던 심재찬 연출은 "이번 공연을 기점으로 극단이 재 창단된 것 같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인생에서 상처와 아픔으로 잘려 나간 웨딩케이크 한 조각이 별것 아닌 것을 아신다면, 오늘 가족 선물은 케이크가 어떨까. 그것도 온전한 케이크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