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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12> 파초 잎에 시를 쓰다

이재관(1783-1837),
이재관(1783-1837), '파초하선인도(芭蕉下仙人圖)', 종이에 담채, 139.4×66.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풍잎, 오동잎, 파초잎 등에 시상을 풀어놓는 엽상제시(葉上題詩)는 오래전부터 운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 식물의 잎 중에서도 파초잎에 시를 쓰는 초엽제시는 중국 당나라 위응물, 백거이 등의 시에 나온다. 마치 종이인 양 파초는 시인의 붓을 이끌었다.

이재관의 '파초하선인도'는 거대한 바위와 파초를 배경으로 붓을 들고 파초잎을 마주한 선인(仙人)과 묵동(墨童)을 그렸다. 넓은 파초잎이라 먹도 많이 필요해 묵동은 커다란 벼루에 열심히 먹을 간다.

상서로운 붉은빛 책상 위에 놓인 향로, 빙렬이 있는 도자기 주전자, 잔, 필통으로 삼은 고동기(古銅器) 등은 주인공의 격조 있는 일상을 암시한다. 고동기에는 붓과 두루마리가 꽂혀있고 여의(如意)도 보인다.

한손으로 파초잎을 짚으며 쪼그려 앉은 선인의 자세, 묵동의 맨발과 더벅머리는 고상한 이 장면에 소탈한 자연스러움과 해학적인 풍속화의 맛을 준다. 파초를 시든 패초(敗蕉)로 그린 것도 그렇다.

먹의 강약과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속도감 있는 붓질이 노련하고 녹색, 푸른색, 붉은 색의 은은한 담채를 부드러운 먹색과 조화시키며 화면에 생기를 돌게 한 색채 감각이 대가의 실력이다.

두툼하고 투박한 붓질과 예리하고 섬세한 세필이라는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필치를 강렬하게 대비시키며 함께 사용했다. 표현적인 사의(寫意)와 묘사적인 공필(工筆)을 과감하게 결합하며 기묘하게 공존시킨 이재관의 독특한 필묵법이다.

오른쪽에 "파초잎에 시를 쓰다"는 "파초엽상게제시(芭蕉葉上揭題詩) 소당(小塘)"으로 썼고 인장은 '일필석실(一筆石室)', '소당'이다. 왼쪽 제화는 강세황의 증손자인 강진의 글이다.

파초잎을 종이의 낭만적 대용물로 여기는 초엽제시의 멋스러운 풍경이 그림에 자주 나오지만, 파초잎에는 종지연자(種紙鍊字) 고사도 있다. "종이(파초)를 심어 글씨를 연마하다"라고 한 이 이야기의 서예가는 중국 당나라 회소다.

당나라 때는 시승(詩僧) 제기, 화승(畵僧) 관휴 등 문예에 뛰어난 스님이 많았는데 회소는 자유분방한 파격의 초서로 유명한 서승(書僧)이다. 회소 스님은 가난해 종이를 살 수 없었다. 그래서 파초 1만여 그루를 집 둘레에 심어 파초잎을 종이 삼아 글씨 연습을 했다고 육유의 '승회소전(僧懷素傳)'에 나온다.

파초잎으로 종이를 대신한 초엽대지(蕉葉代紙)에서 파초는 부단한 수련과 각고의 노력을 상징하게 된다. 회소 스님이 온통 파초로 뒤덮인 자신의 집을 '초록하늘 집'인 녹천암(綠天庵)이라고 한데서 녹천은 파초의 별칭이 되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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