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언니(친언니 같은 친한 언니).
90년대생의 여성이라면 초등학생 시절 유행했던 '양 언니'를 가져본 경험이 있지 않을까. 적어도 기자가 다닌 초등학교에서는 2000년대 초반, 양 언니 열풍이 일었다. 돌이켜보면 '풉' 거릴 정도로 유치한 놀이었지만 당시의 나와 친구들은 양 언니에 울고 웃었다.
양 언니를 정하는 방식은 간단하되 특이했다. 물론 평소 알고 지내던 친한 사이라면 양 언니 관계 맺기는 아주 쉽다. "야 우리 양 언니-양 동생 하자"는 말 한마디면 끝이다.
그게 아니라면 소위 말해 우리들은 언니들의 '간택'을 기다려야 했다. 대개 간택의 방식은 이렇다. 쉬는 시간 교실 뒷바닥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고 있으면 위 학년의 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와 "너 나와"라고 손짓한다. 어떤 언니가 오느냐에 따라 희비는 엇갈린다. 그들이 누구를 양 동생으로 지정할지 고심하듯 우리도 어떤 언니가 내 양 언니면 좋겠다는…이왕이면 소위 잘나가는 언니면 더 좋겠다는 희망을 품는다. 만약 그렇지 않은 언니가 '양 언니 맺기' 카드를 들이밀었을 때 "싫은데 해야 한다"며 눈물까지 흘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양 언니-양 동생 관계가 형성했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한 팀이다. 그 관계에서 암묵적인 규칙도 있다. 서로의 생일은 물론 투투(관계를 맺은 지 22일을 맞아 기념하는 것)나 100일을 챙겨야 하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양 언니, 양 동생의 교실을 찾아 안부를 확인한다.
기자는 두 명의 양 언니가 있었는데(6학년 양 언니가 5학년 양 언니를 지목, 5학년 양 언니가 기자를 지목), 당시의 나는 막내로 귀여움과 이쁨받는 걸 독차지하고 싶었다. 특히 우리 그룹의 대장인 6학년 양 언니는 얼굴도 예뻐 인기도 많았기에, 그가 내 양언니라는 사실에 한창 목에 힘을 가득 주고 언니 옆에서 걷기도 했다.
유행이 늘 그렇듯 양 언니 열풍은 얼마 못 가 사라졌다. 6학년 언니는 졸업 후에 소식이 끊기면서 이젠 이름과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희미하게 기억이 남는 5학년 언니는 요즘도 불쑥불쑥 생각이 난다. 지금의 초등학생들도 그렇듯 당시 우리의 세상도 또래가 전부였으며, 그 관계망 속에서 배척당하거나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재미있는 시절이었다.
조화진 작가의 장편소설 가 반가웠던 이유도 이 같은 경험 때문이다. 자고로 유행은 돌고 도는 것. 90년대에 양 언니가 있었다면 그보다 앞선 1970년대에는 S언니가 있었다. '수양'의 호칭이 당시 시대에서는 S언니, S동생으로 불렸다. 우리도 그랬듯 70년대에 시대적 변화를 겪는 사춘기 소녀들도 S언니들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통을 겪고 정체성을 만들어 갔다. 이 소설의 큰 이야기 줄기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사춘기 소녀 수자. 서울로 대학 간 친언니 수이, 수자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수양 언니 정순, 글을 잘 쓰는 수자의 단짝 유경, 이대 나온 가정 선생님 문승희, 소설가가 되고 싶은 점방집 언니 등 중학생 수자가 본 언니들은 시대의 편견에 순응하거나 맞서며 자신의 삶을 걸어간다. 언니들은 여자는 시집이나 잘 가면 된다고 말하는 세상에 의해 정형화된 여성의 삶을 강요당하거나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사회로 진출하지 못하고 주저앉기도 한다.
그런 언니들과 맺은 관계 속에서 수자는 선망, 질투, 냉소, 친밀, 체념, 쾌락 등 다양한 사회적, 심리적 성장통을 겪는다. 우정이 중요시되는 청소년기에 S언니의 존재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가 돼 주었고 부조리에 맞서 서로에 대한 증언을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조 작가는 서로를 연결하는 S언니와 S동생의 관계를 통해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폭력이 만연하고 당연시되었던 1970년대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핀다.
S언니, 양언니가 있었던 이들이라면 반가울 책이다. 글을 쓰다 보니 아까 기억조차 안 난다던 6학년 양 언니 이름이 불현듯 떠오른다. '보라'였다. 264쪽, 1만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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