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이라는 롤랑 바르트의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중국의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기녀는 선비에게 자신의 집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100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 사랑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선비는 기녀를 기다린다. 그러나 99일째 되는 날 선비는 기녀를 기다리는 동안 앉아 있었던 그 의자를 들고 사라져 버렸다.
선비는 왜 하루를 더 기다려 원하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스스로 떠났을까? 중학교 교사인 대학원생 한 명이 국어 수업에서 이 서사에 대해 학생들과 함께 얘기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중학생들은, 선비가 99일 동안 가까이서 기다리면서 기녀를 지켜보다가 질려서 떠났을 것, 실제로 관계가 시작되면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책임 문제 때문에 부담이 되어 떠났을 것, 막상 사랑이 이루어지면 환상이 깨질까 봐 두려워서 떠났을 것 등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였다고 한다. 이 이유들은 실제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 혹은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유로 주변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기다림'이라는 제목의 글 말미에 불친절하게 이 서사를 독자에게 툭 던져 놓은 바르트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마지막 순간 선비의 뜻밖의 반전에 해당하는 이 이해하기 힘든 행위는, 사랑과 관련하여 어떤 중요한 진실을 함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생들의 의견에 더하여 몇몇 지인들과 이야기 나눠 본 바를 써 본다.
하나. 선비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떠난 것이다. 선비가 기다린 것은 기녀의 승낙이 아닌, 기녀의 사랑이었다. '당신이 나를 어느 정도 사랑하는지 증명해 보세요'가 아닌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기대한 선비는, 하루를 남기고 마침내 자신이 기대한 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스스로 물러선 것이다. 선비는 마주 보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한쪽이 일방적으로 좋아하다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기울어진 힘의 관계(바르트의 말처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다) 속에서 시작한 사랑이, 마침내 열띤 들뜸이 사라졌을 때 예상치 못했던 피해 의식으로 남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다른 하나. 선비는 계속 기다릴 수 있는 상태로 머물러 있기 위해 떠난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이다. 아이러니하게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통해 그녀를 일상 속에 포함하는 동시에 지연시킴으로써 사랑은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 황동규 시인이 고등학생 때 쓴 시로 알려진 '즐거운 편지'라는 시에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라는 시구가 있다. 상식적 표현인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린다'를 뒤집은, '기다리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 나는 이것을 이런 의미로 읽는다. '내 사랑이 진실인 까닭은 내가 당신을 한없이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한쪽의 마음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는 사랑이 드물게 있기도 하다.
어떤 해석이 마음에 드는지는, 어떤 사랑을 원하는지에 달렸다. 마음에 드는 해석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랑을 꿈꾸는지에 대한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것으로 이 서사는 그 역할을 충분히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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