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판’을 뒤엎고 싶은 마음

역사의 교훈 “혁명 후에 더 나쁜 결과 뒤따라”
‘윤석열 퇴진’, ‘윤석열 OUT’ 등의 구호 사라져야

여론특집부 차장
여론특집부 차장

판을 뒤집자. 엎어 버리자. 새판을 짜자. 갈아엎자. 디비자. 이런 마음은 늘 잠재해 있다. 뭔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때 행동하고 싶은 욕구까지 분출된다. 개인과 집단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감정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깨닫게 되는 교훈이 한 가지 있다. "뒤엎은 후에 더 나쁜 결과 뒤따라."

전 세계의 역사도 다시 한번 되새겨 준다. 혁명 이후에 과연 민중이 바라던 세상이 왔을까. 거의 그렇지 않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시민들이 그토록 꿈꾸던 민주주의 대신 로베스 피에르 독재가 오지 않았던가. 체 게바라 역시 쿠바 혁명에는 성공했지만, 정치에는 실패했다. 혁명의 명분과 이상은 좋았지만, 현실 정치는 그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전혀 달랐다.

우리나라 동학농민운동도 마찬가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이념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바탕으로 가난한 농민들의 새로운 세계를 꿈꿨지만 조선시대 실패한 내란으로 끝났다. 일단 판을 갈아엎자는 데 대한 시원함과 통쾌함에 매료된 이들이 동조했지만 현실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2016년 촛불집회 당시 모습. 출처=블로그
2016년 촛불집회 당시 모습. 출처=블로그 '두눈'

불과 6년 전 촛불혁명으로 돌아가보자.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렸다.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켰다. 정권을 갈아엎었으니, 5년 동안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에 더 큰 혼란만 낳고 있다. 문재인 정권 5년에 분노와 염증을 느낀 국민들은 다시 보수정권으로 갈아엎었다. 그 사이 국민은 갈가리 찢겨졌고, 현 정부는 전 정부에 대해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탓한다. 문재인 정부 때는 전 정부를 아예 '적폐'로 규정해 버렸다.

대선과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패배했지만 아직 국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야당(더불어민주당)은 다시 판을 갈아엎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들의 적폐조차 선(善)으로 포장하고, 국가가 부여한 권력 검찰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심심치 않게 '윤석열 퇴진' '윤석열 OUT' '정권 교체'가 각종 시위에 등장하고 있다. 이제 1년 남짓 지났지만, 야당은 아직도 뒤를 생각하지 않는 혁명을 꿈꾸고 있다. 야당 수장 이재명 대표는 "정권만 잡으면 두고 봐라. 어~~~ 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듯하다.

뒤엎으면 당장은 통쾌하지만 이후가 더 큰 문제다. 이웃나라 일본과 독일 국민에게 배울 점이 하나 있다. 정치의 안정성이다. 두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현대 정치에서 보여주는 리더에 관한 존중은 본받을 만하다. 독일 역사상 여성 최초 연방정부 총리에 오른 앙겔라 메르켈은 16년(2005~2021) 동안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했지만 일본 아베 신조 내각 총리대신도 보수세력의 변함없는 지지 속에 4번이나 총리(제90, 96, 97, 98대)를 역임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윤석열 검사독재 정권 규탄대회. 출처=이소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블로그
더불어민주당의 윤석열 검사독재 정권 규탄대회. 출처=이소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블로그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 속에 억눌린 민중들의 갈아엎고 싶은 마음은 백번 이해하지만 누군가 지도자로 뽑혔다면 나라의 발전을 위해 힘을 실어줘야 한다. 야당이나 진보 지지자들도 아무리 윤석열 대통령이 미워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정확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와 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 김남국 코인 사태 등은 야당 탄압이 아니다. 사법 영역에서 다투면 될 일이다. 최근 민주노총이나 시민 단체에서 나오고 있는 정권 퇴진 운동도 명분이 없는 그저 뒤틀린 혁명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바둑에서 초반 포석에 몇 수를 잘못 두면 판을 갈아엎고 싶은 마음이 든다. 쉽게 말해 새판을 짜고 싶다. 그렇지만 상대가 있기에 그럴 수가 없다. 바둑이 이럴진대, 역사와 정치의 무거움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현재 판을 갈아엎고 싶은 마음 대신 최대한 잘 관리하고, 그 속에서 보완·수정·조정하는 지혜를 발휘하자. 더디지만, 대한민국은 전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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