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전국에서 최초로 거병한 의병장은 대구 달성 출신 문석봉이었다. 당시 문석봉의 봉기는 전국적 의병활동 확산의 기폭제가 되었다.(국가보훈부) 일제의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구에서 주도한 '국채보상운동'도 민족 역사상 최초의 국권회복운동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등은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선구적 단체이다. 이처럼 대구는 항일 독립운동의 출발지 역할을 한 도시다.
1907년 김광제와 서상돈의 주창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도입된 나랏빚 1천300만 원을 갚자고 나선 정신적 독립운동이다. 이 돈은 당시 정부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큰돈이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주도한 이 운동은 신분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고종 황제도 담배를 끊었고, 부녀자들은 반지와 비녀를 뽑아 의연했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 초기의 비밀결사운동도 대구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15년 대구 안일사에서 국권 회복 노선에 기초한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되었고, 대구 달성공원에서는 항일독립운동의 대표적 선도 단체로 평가받는 대한광복회가 창립되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1910년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항일독립운동 단체는 대한광복회였다'라고 소개하였다. 총사령관 박상진과 우재룡, 채기중, 이시영 등 독립투사들을 중심으로 큰 활약을 펼친 대한광복회는 3·1운동과 의열단 창단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민족혼을 일깨우는 저항시를 남긴 민족 시인 이상화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건의 주역이었던 빙허 현진건이 있다. 그리고 안동 태생이면서 첫 번째 필명이 '대구264'였던 이육사가 있다. 상화와 빙허, 그리고 육사는 단 한 번도 친일에 발을 담그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켜 낸 인물들이다.
대구가 독립운동의 출발지라는 명성을 얻은 데에는 학생들의 희생과 끊임없는 투쟁이 큰 몫을 했다. 대구사범학교(다혁당), 대구상업학교(태극단), 대구고등보통학교 중심(신우동맹), 계성학교(혜성단) 등을 중심으로 한 항일 학생 투쟁은 뒷날 2·28민주운동으로 이어졌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독립지사들도 대구 출신이 많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과 현진건의 형 현정건 등은 상하이 임정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종암과 서상락, 송두환과 문영박 등은 임시정부 수립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거나 군자금 모금 운동에 적극 참여한 독립투사들이다. 일제강점기에 의열단 사건 등으로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을 변론한 애산 이인과 같은 항일 인권 변호사도 있다. 대표적인 서화가이자 독립지사인 김진만은 그 아들 김영우와 손자 김일식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투옥되고 순국한 독립운동의 성지인 대구형무소가 있다. 대구형무소의 순국선열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202명이다. 이는 서울 서대문형무소 서훈자 수가 175명인 것과 비교하면 27명이나 더 많다. 또한 전국의 특별·광역시 중에서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의 수도 서울 다음으로 많은 지역이 바로 대구이다.(2021년 기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대구는 견위수명(見危授命) 정신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 구국(救國)운동의 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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