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념 논쟁의 틀은 '개국 대 쇄국'이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 조선이 주자성리학을 수용하는 과정, 구한말에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 해방 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과정 등 문명 전환기의 화두는 '개국 대 쇄국'이었다.
한국의 역사는 언제나 개국이 옳았음을 보여 준다. 개국을 통해서 당시 보편 문명의 이념과 가치, 체제와 제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철저하게 소화해서 토착화시키는 데 성공했을 때는 나라가 융성하였다. 반면 쇄국을 통하여 당시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거부했을 때는 나라가 몰락했다. 오늘날 끊임없는 개국을 통해서 융성하고 있는 남한과 대원군을 무색게 하는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북한의 참담한 상황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또 앞으로도 개국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개국의 당위성은 언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개국이란 나라의 보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그때까지의 사상과 이념, 체제와 제도를 버리고 이질적인 '외래'의 가치관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문명 전환기마다 쇄국주의자들은 기존의 질서를 '전통'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그리고 기득권 유지의 명목으로 반대했다.
쇄국주의자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수용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외세에 휩쓸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외세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우리의 힘으로, 주체적으로 민족의 앞날을 열어 가자고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문명의 도전을 받으면서 체제가 급변하고 기존의 도덕과 윤리가 해체되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는 이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체'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폐쇄적이고 편협한 쇄국주의와 국수주의는 언제나 나라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특유의 문명을 꽃피우고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문명사의 전환점마다 당시의 보편 문명을 철저하게 수용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시대에는 불교신자로, 조선조에서는 주자성리학자들로,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는 개화주의자들로, 기독교인들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주의자로 끊임없이 변신해 왔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불교는 분명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왔지만 아무도 원측과 자장, 원효와 의상이 전하고 불국사와 석굴암, 팔만대장경이 대표하는 찬란한 삼국시대, 신라, 고려의 문명을 중국 또는 인도 문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조선의 주자학은 분명 중국에서 전래되어 온 사상이지만 세종이 세우고 퇴계와 율곡이 설파하고 경복궁과 수많은 서원,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만들어 낸 조선의 문명을 중국 문명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현대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지극히 서구적인 사상과 체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한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특수성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서양의 악기인 피아노를 연주하는 임윤찬을 외래 문물에 휩쓸려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한 젊은이라고 하지 않는다.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을 미국 문명의 매체인 영화를 무비판적으로 채용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없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BTS와 블랙핑크가 미국과 일본의 저질 문화에 물들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없다. 손흥민과 이강인, 김민재는 영국의 국기인 축구를 하면서 서양을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국위를 마음껏 선양하고 있는 '국가대표'들이다.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서양의 학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류 보편 문명의 꽃인 수학을 누구보다 잘하는 천재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진정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번영을 기하는 길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개국만이 살길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이 교훈을 배우지 않고서 역사를 들여다보고 해석을 하고자 하기 때문에 쇄국주의로 귀결되는 수많은 왜곡과 억지가 자행되고 있다. 또 한 번의 문명사적 전환기에 서 있는 우리나라가 생존과 번영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는 길은 개국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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