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칼럼에서 필자는 대구에서 불씨가 지펴진 국채보상운동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 즉 대체 대한제국 외채가 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폭증했는지, 그 이유를 추적해 본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황제로서의 체통과 존엄을 드높이기 위해 황실 품위유지비를 대폭 증액했다. 1897년부터 1907년까지 10년간 내장원이 거둬들인 총수입은 4,350여만 원이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을 황실 품위유지비(황실 제사 및 능과 전각의 수리 비용 등)로 사용했다(장영숙, 「대한제국기 고종의 풍경궁 건립을 둘러싼 제 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3,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0, 77쪽).
특히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맞은 1902년엔 기념비각 건립, 외국사절 초청에 따르는 잔치와 기념식 준비에 200만 원을 지출했다. 1902년 정부 예산이 758만 원이었던 사실과 비교하면 엄청난 액수가 투입된 것을 알 수 있다(이윤상, 「고종 즉위 40년 및 망육순 기념행사와 기념물―대한제국기 국왕 위상 제고 사업의 한 사례」, 『한국학보』29, 2003, 138~139쪽).
1901년 대한제국 정부 예산은 802만 151원이었다. 이중 국방비에 해당하는 군부 예산이 총예산의 44.8%인 359만 4,911원이었다(조재곤, 『고종과 대한제국』, 역사공간, 2020, 386쪽).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이 총예산의 절반 가까이 군사비로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셈이다.
이유는 대한제국 군대는 외적의 침략을 막는 용도가 아니라, 황제를 보위하고 폭동·반란을 예방하는 권력의 폭력 장치였기 때문이다. 국가 총예산의 45%를 황제 권력 수호를 위한 내부 치안용으로 투입한 결과 고위 관리와 외국인 고문 봉급이 몇 달씩 연체되어 주재국 공사들이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아비규환의 와중에도 고종은 군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시로 월급 인상, 특별수당을 지급했다. 구한말 고종이 나라 전체를 가산제(家産制) 국가로 돌변시키는 와중에도 권력이 무탈하게 유지된 것은 이러한 '당근 정책'을 통해 군대를 사병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즉위 40주년 기념 위해 돈을 물 쓰듯…
이런 일이 벌어진 1902년은 고종 즉위 40년 되는 해였다. 과도한 군사비 지출과 그에 따른 재정 파탄으로 고리의 차관을 얻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위기 상황에서 고종은 대한제국의 위용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자신의 즉위 40년을 성대하고 거창하게 준비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기념식의 공식 명칭은 '어극(御極) 40년 칭경(称慶)예식'으로, 행사 기간은 1902년 10월 18일부터 12일간으로 정해졌다. 성대한 관병식을 위해 중앙군과 지방군이 동원되어 훈련에 돌입했고, 광화문 사거리에 황태자의 글씨를 새긴 즉위 40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황제의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석고(石鼓, 돌로 만든 북) 설치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1년 전인 1909년 원구단 경내에 세 개가 완성되었다. 시기가 늦어진 이유는 예산 부족 때문이었다(조재곤, 앞의 책, 127~128쪽).
이 해에 전국에 심각한 흉년이 들어 굶주린 경기도 백성들이 교하의 인조 무덤인 장릉(長陵) 송림에 몰래 들어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는 사건이 벌어졌다. 솔숲에는 쭈그리고 앉아 죽은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제2의 수도 평양에 건설
1902년 5월 15일, 황제 고종은 대한제국은 황제의 나라이니 중국처럼 두 개의 수도를 두어야 한다면서 평양에 제2의 수도인 서경(西京) 건설을 명했다. 윤치호 일기에 의하면 고종은 김정식이란 떠돌이 예언가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양경제처럼 우리나라도 평양에 서경을 건설해야 황제 권력이 무궁해진다"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일을 벌인 것이다(『윤치호 일기』, 1902년 4월 28일).
서경 신축을 위한 1,000만 냥(200만 원)에 달하는 비용 조달 책임자는 민 씨 척족인 민영철이었다. 그는 "평안도 사람들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베어내" 공사를 강행했다. 1902년 대한제국 예산은 758만 원이었다. 한 나라 총예산의 26%를 쓸모도 없는 제2의 수도 건설에 쓸어 넣은 것이다.
1903년 고종이 일본으로부터 사들인 군함 양무호가 제물포에 입항했다. 배의 성격은 순양함이었는데 실상은 갑판에 소구경 포 몇 문을 장착한 고물 석탄 운반선이었다. 배의 도입 가격이 무려 110만 원(일화 55만 엔)이었다. 이 돈도 빚을 내서 마련한 것이었다. 문제의 양무호는 외적 침략 방어용이 아니라, 즉위 40주년 칭경예식 때 서양 외교관을 위한 예포 발사용이었다.
전국의 판소리 명창·광대·기생·무동(舞童) 170여 명을 모아 명창 김창환이 이끄는 전속단체를 만들어 대대적인 연습에 돌입했다. 기념식 때 황제가 황궁에서 행사장까지 이동하기 위해 포드의 2인승 오픈카인 '모델 A' 한 대를 특별 수송해 왔고, 어차(御車) 운용을 위해 일본인 기사를 비싼 월급 줘가며 채용했다. 또 귀빈용 인력거 100대와 칭경예식 때 착용할 대례복을 일본에 주문했고, 외국사절 접대용 고급 물품 300점을 청나라에서 수입했다.
주한 미국 공사 앨런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분에 넘치는 고종의 칭경예식 행사 준비에 대해 "작년의 흉작으로 수천 명이 기아선상에 있고,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는데도, 황제는 사치하면서 돈을 헛되이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외국의 차관을 얻으려고 모든 방면에서 획책하고 있다.
그는 우리 공사관과 인접한 토지에 금년 10월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초대받은 외국사절을 위한 커다란 양옥 건물(덕수궁 석조전-필자 주) 두 채를 건축 중이다. 다가오는 축하연을 위해서 매우 넓은 회의장도 건축 중이다. 궁정에는 상근으로 고용된 무희(기생)가 80명이나 된다"(와다 하루키, 『러일전쟁』1, 한길사, 2019, 624쪽)라고 비판했다.
고종이 국력을 총동원하여 준비했던 칭경예식은 콜레라와 천연두 만연으로 몇 차례 연기된 끝에 러일전쟁 발발로 불발되었다. 대한제국 외채 폭증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한다면, 대체 왜 황제의 낭비벽으로 인한 결과물을 죄 없는 백성들이 갚겠다고 나선 것인지….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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