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박영수가 당긴 사유(思惟)의 방아쇠

최경철 논설위원
최경철 논설위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6월 말 대구 중구 남산동 천주교대구대교구 교구청을 찾았다.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를 비롯해 대구대교구 사제들과 대화를 나눈 박 전 대통령은 꽤 밝은 모습이었고, 대화도 잘 이어 나갔다고 동석한 사람들은 전했다. 아직도 불편한 것으로 알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의 발을 걱정해 사제들이 말렸지만 그는 자청해서 교구 경내 산책에도 나섰다.

박 전 대통령의 교구청 방문 약속은 방문일로부터 한 달여 전 확정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 전 대통령이 남산동 나들이를 한 시점은 박영수 전 '박근혜 국정 농단' 특별검사를 둘러싼 여러 비리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가 급물살을 타던 시점이었다. 박 전 특검이 대장동 개발업자들로부터 이권 청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금품을 챙긴 혐의를 포착했다는 검찰 수사 결과가 나왔고 여러 혐의 사실은 신문에 도배됐다.

6월 말 구속영장이 한 차례 기각됐던 박 전 특검은 검찰이 구속영장을 재차 청구한 끝에 지난 3일 구속됐다. 2014∼2015년 우리은행 사외이사 등으로 있으면서 대장동 업자들의 금융권 청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8억 원을 챙기는 등 모두 19억 원의 뒷돈을 받은 혐의를 검찰은 적용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박영수라는 이름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2016년 12월 1일부터 시작된 특검 수사는 속사포처럼 이뤄졌고 이듬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탄핵을 인용했다. 특검 수사가 박 전 대통령이 탄핵·파면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검찰에 따르면 박 전 특검은 특검 임명 훨씬 전인 2014년부터 대장동 일당과 얽혔다. 특검은 국회가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하는데 현직 대통령이 연관된 중대 사건에 대한 특검 검증에 신중함이 부족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박 전 특검은 2009년 검찰을 떠난 이래 우리은행 사외이사 등 이권에 연루될 수 있는 직책을 지냈기에 더 많은 점검이 필요했다. 대장동 사건 말고도 그는 수산업자를 사칭한 사람에게 포르쉐 렌터카를 받은 혐의까지 밝혀져 지난 2021년 7월 특검을 불명예 사퇴했다.

박 전 특검 사건으로 인해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그의 수사 대상이었던 이들이 반발하는 등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탄핵을 되돌릴 수는 없다. 박 전 특검의 추락을 보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박 전 대통령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탄핵 과정을 면밀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광우병 사태든, 최근의 오염수 논란에서든, 수차례 목격됐듯이 우리 사회의 냄비 근성이 탄핵 과정에 작용하면서 무자격 특검을 내세우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외면한 채 예단과 편견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 봐야 한다. 박 전 특검에게 너무나 쉽게 국민 특검이라는 호칭을 바치지 않았는지도 자성해야 한다.

대통령제의 고향인 미국은 단 한 명의 탄핵 대통령도 만들지 않았다. 탄핵권 남용이 가져올 헌정 혼란을 막기 위해 탄핵만큼은 극도의 절제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사유(思惟)하지 않는 것이다. 검찰에 의해 박 전 특검이 우리 헌정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탄핵 과정에 대한 사유의 방아쇠를 당겼다. 아프고 쓰린 일이겠지만 당시 여당이었던 국민의힘 구성원들부터 얼마나 치열한 사유를 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탄핵 소추를 남발하는 더불어민주당의 논리를 허물어뜨리는 학습 기회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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