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름대로는 애주가(愛酒家)로 구성된 유쾌한 모임이 하나 있다. 모름지기 '술잔을 잘 비우는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이름이 '비우회'이다. 회합을 가질 때마다 애용하는 각자의 아호 또한 모두가 '비'자 돌림이다. 즐겁게 비우고 싶다는 '즐비'가 있고, 때때로 비울 것이라는 '때비'가 있다. 자주 비우는 '자비'가 있고, 말없이 비우는 '묵비'가 있다. 나이에 순응하며 유장한 비움을 지향하는 '유비'도 있다.
무슨 글자든지 갖다붙이면 'O비'가 되면서 저마다 술잔에 어린 관조와 달관의 경지를 시사하는 신비로운 마력이 있다. '비우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홍일점(紅一點)의 아호는 '채비'이다. '채우면 비운다'는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사뭇 흥미롭고도 의미있는 별명이다. 그러다보니 '채비'를 둘러싼 주도(酒道) 공방이 자주 벌어진다. 그 와중의 간단없는 박장대소에 즐겁고 이따금씩 촌철살인에 느껍다.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도 언중유골(言中有骨)의 수작(酬酌)이 예사롭지 않다. '채워야 비울 것 아니냐'는 작주(酌酒)의 요청과 '채워도 왜 안 비우냐'는 권주(勸酒)의 일갈이 교차한다. 어떤날은 '호비'(호쾌하게 비움)를 자처하지만, 어떤날은 '찔비'(찔끔찔끔 비움)로 전락하기도 한다. '즐비'가 '슬비'(슬프게 비움)가 되고 '묵비'가 '시비'(시끄럽게 비움)가 되기도 한다. 인생살이의 축소판이다.
주연(酒宴)은 '다채다비'(많이 채우고 많이 비움)를 선언하며 호쾌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주흥이 무르익으면서 '적채적비'(적당하게 채우고 적당하게 비움)의 자중론이 지배한다. 모두들 50,60대의 연륜에 이르면서 체득한 과유불급의 처세학이다. 그저 사람이 좋아서 만나고 이해관계가 없으니 무욕(無慾)의 술잔이다. 무구(無垢)한 술자리이다. 애써 강권하지도 않고 또 그리 사양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평범한 주향(酒香)에 상응한 농담과 해학 속에 심오한 삶의 비의(秘意)가 스며있을 줄 몰랐다. '잘 채우고 잘 비우자'는 화두(話頭) 하나로 세상살이의 이치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대변할 수 있음에 새삼 놀랐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고 진실은 멀리 있지 않다고 했다. 자고로 동양의 유불선(儒佛仙) 사상과 서양의 기독교적 사유 또한 '잘 채우고 잘 비우자'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성인으로서 진지하게 이상을 추구하며 학문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했던 조선의 선비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중요시했다. 벼슬길이 자신의 학문적 신념과 맞지 않거나, 벼슬살이도 이만하면 되었다 싶으면 미련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을 정리했던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유교사상이었다. 참된 선비정신의 실천이었다.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한게 아니었다. 유교를 곡해하고 악용하며 끝없이 채우려고만 했던 기득권자들의 욕망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가 이렇게 저열하고 혼탁한 것은 민주주의 이념이 미흡한 탓일까. 그것은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는 벌거벗은 탐욕의 충돌로 인한 것이다. 그래놓고는 늘 남 탓을 하고 상대편 비방에 날밤을 새운다.
채우면 비워야 한다. 술잔만 그런게 아니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채우는게 비우는 것이요 비우는게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영육(靈肉)을 함께 지니고 선악(善惡)이 공존하는 갑남을녀에게는 완전한 채움도 완벽한 비움도 어려울 것이다. 그저 좀더 잘 채우고 잘 비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여정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공산주의가 실패하고 민주주의가 한계에 이르는 이유이다. 세상은 천국도 아니요 지옥도 아니다. 내 안에 천사가 있으면 천국인 것이고, 내 안에 악마가 있으면 지옥인 것이다. 천국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특정 종교와 신앙의 댓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는 거창한 사상과 번듯한 교리가 없어서 세상이 시나브로 지옥과 나락으로 추락하곤 했던가.
불교를 탓할 것인가. 유교를 탓할 것인가. 기독교를 탓할 것인가. 산자락마다 절간이 부지기수였던 고려가 망한 까닭은 무엇이며, 마을마다 향교와 서원이 즐비했던 조선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까. 또다른 대안으로 받아들인 서양의 종교들은 한국 사회를 혼란과 갈등으로부터 구제하고 있는가. 한 잔의 막걸리가 열 병의 양주보다 나을 수도 있다. 술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모시는 '主님'을 만들었고, 삶이 따분해 마시는 '酒님'을 만들었다는 의미심장한 얘기가 있다. 그러나 적당히 모시고 적당히 마셔야 한다. 뭐든지 과(過)하면 화(禍)가 된다. 중용지도(中庸之道)는 酒道에도 해당되고 主道에도 적용된다. 일시적 환각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아편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타인의 빈 술잔에 대한 갈증의 공감과 나눔이어야 한다.
유교가 지향했듯이,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로운 공동체 건설을 위한 양보와 희생이 전제되어야 한다. 主님을 모시고 酒님을 마시는 것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천이다. 내 것을 비워서 남의 것을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절에 가는 신도가, 교회에 가는 신자가 정녕 내 것을 비우고 이웃의 것을 채워주기를 서원하고 기도하는 사례가 얼마나 될까. 신은 그 많은 사람들의 끝없는 욕구를 어떻게 다 채워줄까.
'인생은 빈 술잔'이라는 시는 읽었으면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명언을 심심찮게 읊조리면서, '인생은 어차피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것'이라는 남진의 노래는 잘도 따라부르면서, 우리는 정작 내 '빈 술잔'을 두려워한다. 세상의 행복을 내 잔에만 끝없이 채우려고 한다. 그래서 다음 '비우회' 모임 때 건배사가 떠올랐다. '그대여 나머지 설움은 나의 빈잔에 채워주!'
조향래(대중문화평론가,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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