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8월 1일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 현 대구고등법원)과 대구지방재판소(현 대구지방법원)가 이 터에 개원되었다. … 공소원은 경성, 대구, 평양 세 곳 … 대구공소원은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의 전 지역을 관할하였다. … 1923년에 … 붉은색 벽돌로 단장된 2층의 현대식 건물로 지어졌다. … 대구법원이 있어 '법원에서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라'는 뜻에서 공평동(公平洞)의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기단 아래의 붉은 벽돌은 1923년 대구공소원 건립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벽돌이다."
2019년 9월 10일 대구법원의 옛터인 대구시 중구 공평동 58번지에서는 '법원의 날'(9월13일)을 앞두고 '대구법원 옛터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날 대구고등법원과 대구 중구청은 옛날 공소원 건물의 붉은 벽돌 여러 장으로 기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법원과 법원이 있던 동네의 이름 유래, 1973년 11월 18일 현재의 자리로 옮긴 사실 등을 적고 사라진 옛 법원의 흔적을 남겼다.
옛 자료를 보면 대구공소원은 1908년 개원 때 한옥 기와지붕이었다. 이후 옛 공소원은 관급의 연와(煉瓦·지금 벽돌의 당시 표기)로 지어졌다. 즉 대한제국은 1906년 탁지부 건축소를 창설해 관공서와 감옥 신축 등에 벽돌을 공급했다. 1909년 탁지부 건축소 연와제조소의 벽돌 생산·공급 자료에는 대구공소원과 평양공소원 등에 653만 8천여 장의 벽돌을 공급한 것으로 나온다. 또 대구법원은 1908년 한옥에서 시작, 1910년, 1923년, 1973년까지 여러 차례 건축 방식이 바뀌었음도 알 수 있다.
1923년 대구법원 건물에 사용된 벽돌은 물론 나라가 망한 뒤의 일이라 어디서 생산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제 식민시절 벽돌 생산 공급은 조선총독부의 관영(官營), 개인, 기업체 차원의 세 갈래였다. 관영 벽돌에는 감옥의 한국인들의 값싼 착취 노동력으로 생산된 제품도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일제는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전 전국 16곳 감옥을 22~30곳으로 늘렸고 저항하는 한국인이 많으니 가둘 곳도 많이 지었고 이들의 값싼 노동력도 이용했기 때문이다. 대구감옥의 종이, 광주감옥의 벽돌 등 각종 물건들이 그렇게 제조, 공급됐다.
옛 대구법원 터에 세운 기념비를 받치는 100년 벽돌은 일제의 이런 지난 세월을 말해주는 역사 일부를 간직한 유물이다. 대구법원이 굳이 옛 법원 벽돌을 받침돌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 '공평동'이란 이름과 달리 일제 법원의 '불공평' 판결로 대구형무소에서는 숱한 한국인과 독립운동가가 사형되거나 갇혔다. 이런 얼룩진 흑역사를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까. 벽돌 한 장 생산에 피땀 흘렸을 한국인 노동을 기억하자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약 35년의 식민 과거사를 되새기자는 취지였을까.
그런데 이런 100년 역사의 벽돌이 사라졌다. 지난해 기념비는 당초 장소가 아닌 곳으로 옮겨졌다. 그때 버려졌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행방이 묘연하다. 그저 그런 벽돌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구법원과 대구형무소에 얽힌 아픈 역사를 간직한 100년 법원 벽돌은 그 이상이다. 그래서 그 행방이 더욱 궁금하다. 다행히 대구 중구청에서 벽돌 추적에 나선다고 한다. 100년 벽돌을 기다리며 광복절의 8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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