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원작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이 비슷한 시기에 뮤지컬과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정영주가 알바 역을 맡은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연출 변유정)는 배우의 감각을 다 쏟아낸 공연이었고, 문삼화가 연출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원종철 배우가 지속 가능한 연극 축제로 키워나가고 있는 제4회 '여주인공 페스티벌' 참여작이다. 정영주의 <베르나르다 알바>는 원작의 극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도 서사와 음악과 춤이 강렬하게 작용하는 뮤지컬의 고전적 미덕이 담긴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김기란 연극평론가는 "드라마 요소를 포기하지 않은, 음악과 춤이 드라마를 한층 강화시킨 공연"이었다면서 "춤과 음악, 극적 긴장, 성격을 드러내는 음색의 대비가 110분의 공연을 균형감있게 채웠다"고 평가했다. 문삼화 연출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억압된 여성의 욕망이 비극적 서사로 구현되는 로르카의 원작을 원 포인트 연출을 통해 동시대성을 지닌 '여성의 비극'으로 해석한 공연이었다.
문삼화가 연출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는 남편의 죽음 이후 8년 동안 상복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딸들은 검은 옷과 히잡을 쓰고 등장한다. 아랍 여성의 주체적인 삶과 인권, 평등과 자유, 생명을 외치며 '히잡 반대' 시위가 늘어나고 있는 세계 분위기에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여성의 주체적인 욕망과 자유를 억압하는 동시대 사회구조를 상징하며 딸들의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히잡 시위에 빗대 비극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에 원 포인트 뒤집기 연출이 가미되어, 극 중 인물과 장면에는 우리 사회를 은유하는 내용이 담겼다. 알바의 집은 MZ 세대 여성들이 일하는 현재의 공간적 배경이 되고, 과거 알바의 집에서 비극적 삶을 마친 여성들은 여전히 집을 지키고 있는 사진 속 인물로 표현된다. 관객들은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체험하고 사진으로 박제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알바의 노모 호세파를 남성 배우가 연기한 점이 흥미롭다. 호세파는 163세에도 MZ 세대들이 살아가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지키고 있는 인물로 설정되는데, 호세파 역할을 남성 배우가 연기한다. 원작을 뒤집은 이러한 설정은 여전히 남성의 욕망을 보이는 호세파를 표현하기 위한 연출적 선택으로 보인다.
◆ 원종철 배우의 '여주인공 페스티벌'
'여주인공 페스티벌'의 의미는 원종철 배우 개인의 노력으로 이어지는 연극 축제이면서도 여주인공 서사가 특화된 페스티벌이라는 차별성에서 찾을 수 있다. 원종철 배우는 여주인공 페스티벌을 지속시키기 위해 24시간 보험 현장 출동과 아르바이트 등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원종철 배우의 1년은 오로지 '여주인공 페스티벌'을 위해 헌신하며, 그 결과를 연극인과 배우들에게 헌정(獻呈)하고 있는 것이다. 페스티벌의 살림살이가 여러 도움으로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 개인이 축제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비용으로는 벅차다. 그럼에도 그는 버텨내고 있다. 올해 4회를 맞은 여주인공 페스티벌은 물빛극장에서 5개 작품, <몽심>(스테픈 울프, 정리니 작, 연출), <사시랑이>(극단 민예, 김성환 작, 연출), <안해>(극단 메들리, 박현철 작, 김은민 연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공상집단 뚱딴지, 로르카 작, 문삼화 연출), (극단 창창, 백지영 작, 최원종 연출)가 공연되었고, 시어터 쿰에서는 4주년 특별공연인 <코리안 특급>(차현석 작, 연출)이 7월 13일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종철 배우는 자신의 페북에 글을 남겼다. "연극 연습을 하면서 스마트폰을 수시로 들여다본다. 보험 출동 서비스 알림이 뜨면 타이어를 교체하고 받는 비용은 만오천 원 정도다. 그것도 고맙다. 돈이 모아지면 연극을 할 수 있고 축제를 치를 수 있어 감사하다." 여주인공 페스티벌에 많은 지원과 관심이 모아져, 고전극부터 현대극까지 여주인공을 주제로 한 다양한 국내외 작품들이 소개되었으면 한다. '대한민국 여주인공 페스티벌'이 될 수 있도록 문화지원단체나 정부 기관의 관심이 모아질 필요가 있다.
◆ 문삼화의 원포인트 연출
원포인트 연출, 어떤 작품이든 반드시 문삼화 연출만의 특징을 살린다는 의미이다. 희곡을 그대로 두지 않고 비틀고 뒤집어 동시대와 연결하고 연극적 감각으로 발휘한다는 것이다. 문삼화 연출은 예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고령화 가족> 연출부터는 연극성과 연극의 재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연극을 통해 강렬한 질문은 던지되, 위로가 위안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을 연출했어요. 지금은 너무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 싫어해요. 앞으로는 코미디만 하려고요." 그래서일까. 1964년 초연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억압과 인간 욕망의 고전적 비극성을 MZ 세대가 살아가는 현재로 연결하고 있다. 1930년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스페인 남부)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집이다. 마치 '근대의 집'을 체험하는 박물관처럼. 베르나르다 알바와 다섯 명의 딸, 두 하녀와 노모를 100여 년을 버티고 있는 집을 떠도는 혼령으로 설정한다.
남편이 죽은 후 8년 상을 치러야 하는 것은 베르나르다 알바 가문 장례의 전통이다. 외부와 차단된 채, 베르나르다 알바의 가부장적 폭력성과 억압, 한 남자를 사이에 둔 피 튀기는 욕망의 전쟁, 막내딸의 죽음을 뒤섞은 것이 원작의 플롯이다. 문삼화 연출은 "베르나르다 그 집은 옛날 집인데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현재에도 대(代)를 이어 살고 있어" 라고 말하는 듯하다. 검은 히잡을 두른 것처럼 알바와 다섯 명의 딸들은 집을 떠도는 혼령처럼 프롤로그 장면부터 죽은 자의 좀비 놀이를 보여준다. 죽어서도 베르나르다 알바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딸들은 엄마와 한 몸으로 섞이고, 그 중 큰 딸인 앙구스티아스만이 다른 복장(바지)의 몸으로 배다른 아버지의 딸이라는 암시를 준다. 소극장의 무대 구조는 이중으로 되어 있다. 마치 한 집처럼 보이면서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중 구조의 느낌이랄까. 무대 앞, 집 내부 공간은 오래전 알바와 다섯 딸의 환영이 존재하는 공간이고, 그 뒤가 현재의 시간이다. 여기서 문삼화 연출의 원 포인트 연출의 설정이 나온다. 두 공간을 오가는 하녀들은 대를 이어 이 집을 지켜가는 하녀들이 되고, 베르나르다 알바 가문의 지나간 이야기는 뒤에 걸린 베르나르다 알바 가족의 사진 액자가 채워지며 흘러가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두 명의 하녀들은 사진 속 알바 가문의 비극적인 사연을 들려준다. 극 중반까지 원작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큰딸과 로마노와의 결혼이야기로 가속 페달을 밟고, 바람둥이 기질의 로마노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딸들의 질투와 욕망으로 난장판이 된다. 딸들을 향한 알바의 억압은, 미망인이 된 그녀도 사랑을 갈구한다는 점에서, 딸들과 동일한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이번 공연에서 베르나르다 알바의 엄마인 호세파(한철훈 분)를 남자배우로 설정한 것은 재미있는 뒤집기이다. 남성에 대한 억압된 욕망은 베르나르다 알바 가문의 비극적인 가족사의 본질이다. 늙은 여성 호세파를 '남성성'으로 치환한 문삼화의 원포인트 연출은 비극적 코미디 감각으로 다가온다. 극 후반 마지막 장면이다. "원작과 좀 다르게 흘러가네" 할 즈음, 무대 구조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즈음, 다섯 명의 딸과 알바를 무대 뒤 응접실에 걸린 빈 액자에 위치시켜 가족사진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대를 이어 집을 지키는 하녀들을 통해 이 집에 떠도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삼화는 확실한 원포인트 연출의 미장센을 만든다. 여기서 원포인트에 원플러스 장면이 더해진다. 하녀들은 박물관 같은 이 집에서 일하는 MZ세대들이고(이들은 배꼽티를 입고 있다 !), 알바의 집을 지키는 것은 163세의 호세파다. MZ세대인 하녀들은 한마디 던진다. "할머니 아직도 여기 사시네. 좀 가셔야죠 이제." 극은 마치 박물관이 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 비극적 가족사의 공포를 체험하는 것같은 분위기로 끝난다.
마지막 장면의 시공간과 호세파가 여전히 현재에도 살아있다는 식의 설정이 연결이 안 되면서도, 원작을 유쾌하게 뒤집는 문삼화 연출의 원포인트가 연극적 놀이임을 알게 되면, 프롤로그부터 극의 마지막까지는 논스톱으로 연결된다. 문삼화 연출의 <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대를 이어가는 하녀들의 노동을 MZ세대의 그것으로 연결하여,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작동하는 욕망, 억압, 폭력의 문제를 남자배우가 분한 호세파라는 인물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호세파의 설정이 연출의 원포인트인 것처럼 한철훈 연기도 원포인트다.
◆정영주 배우의 무대, <베르나르다 알바> 로르카 원작의 묵직한 색다름.
억압과 폭력, 삶의 욕망과 죽음의 비극성을 담고 있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다양한 버전으로 봤지만, 변유정이 연출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예술감독 정영주, 정동극장)는 뮤지컬이면서도 연극적 요소가 당당하게 조합된 독특한 공연이었다. 원작의 극적 요소를 연극성으로 살리면서도 뮤지컬 무대가 요구하는 요소들도 놓치지 않고 채워냈다. 음악(김성수 편곡, 음악 감독 서동민)과 그것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가창력이 뛰어나고 극적 긴장을 끌어내는 연기와 플라멩코 군무 앙상블 등 노래하고 연기하며 춤추는 앙상블이 대단하다. 특히 플라멩코는 광활한 대지에서 살아가는 고대 스페인 민족의 아픔이 배어 있으면서도 집시의 강렬한 생명력과 삶의 영혼을 담아내는 음악이다. 그만큼 플라멩코는 강렬하면서도 아프고, 비극적이면서도 생동하는 인간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딸들에게 알바가 허락하지 않는 욕망,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는 알바로부터 벗어날 길 없는 억압된 삶을 플라맹코 군무(플라멩코 안무감독 이영자, 안무감독 채현원)에 압축한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때로는 뮤지컬다운 스펙터클 사이에서 연극적 장면들이 겉돌 수 있고 튈 수도 있는데, 로르카의 원작에서 연극성을 제거하면 오히려 뮤지컬도 극도 될 수 없음을 작품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정영주 배우와 연출은 알고 있는 듯했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겉돌지 않게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상업 뮤지컬과의 차별되는 지점이다. 무대 전면의 거대한 집과 문은 삶의 욕망이 멈춘 딸들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투사하고, 수동적으로 감옥 안 죄수처럼 살아가는 딸들의 비극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배우들의 몸을 의자 오브제에 결합시켜, 인물들의 감정을 의자의 각도나 배치의 변주만으로 드러낸다. 알바 역의 정영주는 허스키한 음색과 힘 있는 목소리로 카리스마 넘치는 전율을 끌어내고, 그것이 살갖을 파고들 정도로 괴기하고 놀랍다. 때로는 그것이 폭력이 내재된 억압적인 그로테스크함으로 확장되어, 정영주 배우의 이미지와 소리는 연기로 관통되어 베르나르다 알바의 삶 자체로 응축된다.
알바와 그녀의 다섯 딸은 상복을 입고 등장한다. 마치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영혼처럼. 무대에는 붉은 박스에 갇힌 8개의 의자와 플라멩코 신발, 그리고 어둠 속의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극이 서서히 움직이고 프롤로그 이후 베르나르다 알바의 의자가 등장하여, 의자는 10명의 극 중 인물들과 무대 위에서 분신(分身)처럼 존재한다. 강렬한 박수 리듬과 발을 구르는 소리는 플라멩코의 강렬한 욕망을 드러내고 리듬의 규칙은 같은 듯 다른 각자의 내면을 표현한다. 한 남자를 두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넷째 마르티리오와 막내딸 아델라, 사랑을 쟁취해 베르나르다 알바로 부터 벗어나려는 딸들과 베르나르다 알바의 대립, 남성을 향한 욕망이 격렬하게 섞인다. 특히 막내딸 아델라(이지연 분)의 플라멩코 독무가 인상적인데, 흰색과 검정색을 배색한 이미지는 마치 광활한 자연과 삶으로 달리고 싶은 말처럼 형상화되었다. 베르나르다 알바와 죽음의 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의자로 형상화된 아델라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정영주 배우의 무대이면서도 배우들의 고른 연기가 돋보였다. 뮤지컬 넘버는 시적이면서도 로르카의 원작 대사를 대체할 만큼 묵직하다. 호세파로 분한 연극배우 강애심, 김희정의 연기와 노래는 그들이야말로 절묘한 캐스팅의 한 수였음을 알려준다. 두 배우가 이렇게 뮤지컬에 적응할 수 있음을 공연을 보면서 알았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 3/2 이상의 기립 박수는 정영주 배우를 위한 헌사처럼 들렸다. 정영주 배우와 극 중 인물인 베르나르다 알바는 무대를 통해 분신처럼 느껴졌고, 그녀가 이 작품의 라이센스에 그토록 애착을 가진 이유를 알 듯했다.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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