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그 무엇도 말릴 수 없는 밤 10시의 감성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대구 달서구 월성네거리에서 테이크아웃 전문 카페를 운영 중인 48세 서영 씨가 수성구 범어동으로 출발한 것은 밤 9시 45분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슬하에 고등학교 3학년, 중학교 3학년 두 딸을 두고 있는 서영 씨는 요즘 남편 귀농문제로 마음이 심란하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도 9시쯤 카페를 닫고 어느 군(郡)의 귀농학교에 있다는 남편과 통화를 하다가 언성이 높아져 버리고 말았다. "아, 제발 그만 좀 해. 전세금으로 대출을 받아 하우스 짓겠다는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그러나 서영 씨는 차마 '이혼하겠다'는 말도 오늘 딱 5만원 벌었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서영 씨의 차가 범물터널을 거쳐 대구박물관 앞을 지나고 있을 즈음, 벌써 10시 10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때 큰딸에게서 카톡이 도착했다. '엄마 어디야? 나 오늘 학원 모의 테스트에서 수학 만점. 하나도 안 틀림.' 무엇을 그리 참고 있었던지 앞산터널 진입 때부터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서영 씨가 온몸에 힘이 풀리나 싶더니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침산동에 살고 있는 50세 진석 씨는 평소 밤 9시 30분쯤 집을 나서는데, 오늘은 20분 일찍 범어동으로 출발했다. 어젯밤 10시쯤 진석 씨의 파란 천막이 쳐진 1톤짜리 트럭은 대구KBS 방송국 앞에서 가벼운 접촉사고를 냈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가 간신히 차를 밀어 넣을 만한 공간을 발견한 진석 씨가 급하게 핸들을 꺾은 것이 화근이었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상대방 차가 최신형 S클래스였다. 차에서는 명품 반바지에 보트슈즈를 신은 40대 초반 정도의 남자가 내렸는데, 제법 젠틀하게 사후처리를 하는 모습에 진석 씨는 더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래서였을까? 어젯밤 진석 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시험에 걸려 25분이나 늦게 차에 오른 고2 아들녀석에게 와락 짜증을 내버렸다. 학원을 당장 때려치우라는 말까지 해버렸다. 잠시 벙찐 아들이 룸미러로 제 아빠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핸드폰을 가방에 밀어 넣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오후 4시 반에 학교를 마치고 쉬는 시간도 없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범어동으로 달려가는 그 착한 녀석에게…. 나는 정말 왜 그랬을까? 진석 씨의 트럭이 학원 맞은편 도로변에 주차한 것은 9시 40분쯤이었다.

'아빠, 저 영어 학원 보내주세요. 다음 시험에 영어 1등급 꼭 받을게요.' 평소 숫기는 없지만 일찍 철이든 아들 녀석이 진석 씨에게 그 문자를 보낸 것은 두 달 전 일이다. 진석 씨는 이 녀석이 문자를 보내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 지를 떠올리다가 그 씁쓸한 철딱서니가 꼭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그만 가슴 한편이 뭉클해져 왔다. 진석 씨는 고개를 돌려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원 건물의 불빛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세상에는 논리와 이성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학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들은 사실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과도한 사교육비와 가계부채, 무너진 공교육과 교권, 빈부의 차가 곧 교육의 격차로 이어지는 서글픔. 그리고 또 대부분의 부모는 알고 있다. 오늘 학원에 소비한 내 돈이 내 자식의 미래를 밝히는 데 큰 밑바탕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식이 공부하고 있는 모습은 부모에게 그 무엇도 뜯어말릴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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