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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15> 한강의 ‘채식주의자’, 식물성 미(美)와 에로스

이경규 계명대 교수

식물 이미지. 게티이미지 뱅크
식물 이미지. 게티이미지 뱅크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오해와 비판 속에 잊혔다가 2016년에 큰 상을 받으면서 재인식된 연작소설이다. 아버지도 저명한 작가(한승원)인데, 그는 딸의 세계는 매우 신화적인 데 기반을 두고 있다고 했다. 과연 그러한 것이, 나무가 되려는 '채식주의자'의 여주인공은 그리스 신화에 자주 나오는 요정을 닮았다. 오만한 아폴로의 구애를 못 견뎌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 거대 남근의 프리아포스를 피해 연화수가 된 로티스, 호색한 사티로스의 스토킹 때문에 갈대로 변신한 쉬링크스 같은 님프 말이다. 모두 이기적이고 폭압적인 '짐승남'을 피해 식물로 변신한 여성들이다.

극단적인 채식을 넘어 나무가 되려는 영혜도 저 나무 요정들과 유사한 입장이다. 폭력과 약육강식을 동반하는 육식문화를 견딜 수가 없다. 다만 그녀의 나무 되기는 주체적인 자아가 소멸하는 '식물인간'을 뜻하지는 않는다. 생의 역동성과 에로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정반대다. 그 단적인 예를, 소설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이라고 하는 형부와의 성관계에서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형부를 제쳐두고 영혜 쪽에 초점을 맞춰보면 불편함이 많이 누그러진다.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난다며 멀쩡한 남편과의 잠자리도 거부하던 그녀가 낯선 남자(J)든 형부든 개의치 않는 것은 이들의 피부에 꽃이 있기 때문이다. 영혜에겐 식물성이 에로스의 근본 조건이다. 그녀의 엉덩이에 있는 꽃잎 모양의 몽고반점은 그녀의 식물적 경향이 아주 원초적임을 암시한다. 식물계에 도덕이나 관습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온몸을 꽃으로 페인팅한 영혜는 역시 꽃으로 변신한 사람(형부)에게 강한 에로스를 느낀다.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은 꽃 인간 혹은 인간 꽃이 되어 환상적인 교합을 벌인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꽃은 식물의 성기다. 식물분류학의 기초를 놓은 린네는 꽃은 수술과 암술이 사랑을 나누는 단계라고 했다. 영혜는 그야말로 식물적 에로스를 적극적으로 펼친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형부에게는 "가장 추악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이지만 식물로 빙의된 영혜에게는 그런 의식 자체가 없다.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육체"의 느낌만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의 교합이 끝난 후 남자가 바라본 여자의 눈은 어린아이 같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은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아무것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텅 빈, 그래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한 눈동자란 동물의 것일 수 없다. 꽃 같은 식물적 형상이다. '채식주의자'의 미학적 뇌관은 여기에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로서 현실과 바로 연계시킬 수는 없다. 다만 그 상상력이 지향하는 바가 뭔지는 추론해 볼 수 있다. 유사 이래 인간은 줄기차게 아름다움과 에로스를 추구해 온 동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갈등과 폭력이 개입되어 인간사를 비극으로 물들였다. 주된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이 비극의 근원이 동물성, 바로 '이성적인 동물'의 속성이라면 그것을 아예 식물성으로 치환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실패한 이성의 시대 앞에 던진 '채식주의자'의 질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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