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에서 바흐의 선율이 들려온다.'
6·25전쟁 중 피란 수도 대구의 르네상스 다방에 온 외국 기자의 타전이다. 폐허였다. 불타 버린 산이었다. 사방에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엄혹한 세월, 1953년 휴전 직후였다.
그로부터 단 35년 뒤인 1988년, 대한민국은 세계의 기적을 일궈 냈다. 진흙과 오물과 살육과 찌든 가난, 상이군인들, 깡패들로 시들어 가던 나라가 한 세대 만에 뒤바뀌어 160개국 1만3천626명의 선수단과 세계의 텔레비전 앞에 화려한 창공으로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올림픽 공식 주제곡이 울려 퍼진 1년 뒤, 마법처럼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동독 사람들은 회상했다. 동구 사회주의권의 제일 선진국이던 동독보다 모든 것이 더 풍요롭고 자유로워 보이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보고 공산주의를 더 이상 참아내기 어려웠다고. 1949년 사회주의 공화국을 시작했을 때 동독은 대한민국과 비교를 불허하는 초격차의 선진국이었다.
1953년부터 1988년까지 첫 번째 35년간 대한민국은 망국의 가난을 간신히 면하고, 정부 형태와 안보 태세를 가다듬은 뒤 질주를 거듭하여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했다. 가히 혁명적이라 불릴 만큼 유례없는 속도의 근대화였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겪은 첫 번째 35년이었다.
1988년으로부터 35년이 지난 올해, 우리는 '새만금 잼버리'를 통해 두 번째 35년을 되돌아보게 된다. 새만금 잼버리는 지난 35년 전과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한민국은 아직 뻘밭 위에서 진흙과 오물, 막장 샤워실이 찌든 더위 속에 악취를 풍기는 나라였다.
세계는 혼란스러워했다. 어느 것이 진짜 대한민국인가. 잘사는 경제대국 자유 한국과 지저분하고 끈적거리며 답답한 나라 중에 뭐가 참모습인가.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 두 개의 대한민국은 우리 사회에 공존하고 있다. 첫 번째 35년으로 이룬 도약적인 발전의 겉모습 안에 여전히 담겨 있던, 두 번째 35년의 대한민국의 속모습과 그 실상이 새만금 잼버리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1988년 이후 두 번째 35년 동안 우리는 국가의 일관된 목표를 상실했다. 이미 선진국이 다 된 듯 느슨해졌고, IMF 외환위기 사태 후에는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이 삶의 전부인 양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세계를 다 다녀 봐도 대한민국이 최고'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제도와 문화, 관행, 의식처럼 쉽게 보이지 않는 영역이 사실은 선진국의 핵심이라는 점을 간과해 왔다.
첫 번째 35년의 입구에서 우리는 극한의 폐허 위에 서 있었지만 우리는 주저앉지 않았고 다시 일어섰다. 우리는 나라를 지키고, 일으켜 세우고, 잘살고 내로라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질주해 어느 정도 성공을 인정받았다.
두 번째 35년의 말미에서 새만금 잼버리를 통해 마주친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통해 다음 35년을 위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우리가 한동안 놓치고 있었던 국가적 목표가 무엇일까? 이제라도 그 목표를 이루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리더십과 시민정신이 절실한 시점이다.
8월 소금밭의 땡볕이 우리 모두에게 그토록 따가웠던 만큼, 선진국 중의 선진국, 세계 문명을 선도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운명적인 목표를 뚜렷이 자각하고 새로운 35년을 맞이하기를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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