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문환의 세계사] 함무라비 법전, 판결 오류 판사 12배 배상에 영구 추방

보르도 가론 강과 보르도 대성당. 3권분립의 창시자 몽테스키외의 고향이다.
보르도 가론 강과 보르도 대성당. 3권분립의 창시자 몽테스키외의 고향이다.

포도주의 명산지 프랑스 보르도(Bordeaux). 메독이나 꼬냑 같은 생산지도 보르도 지역에 자리한다. 대서양 연안이어서 겨울에도 온난하고 맑은 날이 많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가론 강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보르도를 매력적인 관광 도시로 자리매김한다. 보르도 출신으로 현대 대의민주주의제도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 몽테스키외다.

1748년 59살 때 40년 연구성과를 정리해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을 펴내며 입법, 사법, 행정의 3권분립을 정립했다. 사또 변학도가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을 옥에 가두는 데서 보듯 동서고금에 사법권은 행정권에 예속됐다. 이를 뒤집은 혁명적 발상이다. 탄압을 피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익명으로 출판했지만, 전 유럽에서 호평받았고, 1776년 3권분립 민주국가의 효시, 미국 탄생에 이념적 토대가 됐다.

민주주의 역사가 길지 않은 한국에서 사법부 적폐가 화두로 떠올랐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국민 손으로 선출되며 견제장치를 갖춘 데 비해 사법부는 다르다. 독립왕국과도 같다. 정치편향 판결, 재판지연, 대법원장의 거짓과 위선에 사법부의 신뢰는 무너진 지 오래다. 사법부 독단을 막을 대책이 절실한 상황에서 인류가 마련했던 사법정의 세우기 제도의 역사로 들어가 본다.

함무라비 법전. 루브르 박물관
함무라비 법전. 루브르 박물관

◆ 282개 법조항 4천년전 함무라비 법전

알렉산더가 이끄는 그리스인들이 B.C331년 페르시아 제국을 붕괴시키면서 지구상 최고 역사고도 바빌론을 손에 넣는다. 이어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인더스강 유역 펀잡까지 정복하고 B.C 324년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수도이던 수사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마케도니아 장군들과 페르시아 여인들 사이 동서 합동결혼식을 치른다. 자신도 2명의 페르시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비록 1년 뒤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대부분 파경을 맞지만... 수사는 메소포타미아와 인접한 이란의 역사 고도다. 이곳에서 1901년 12월-1902년 1월 세일(J. V. Scheil)이 이끄는 프랑스 고고학팀이 길이 225cm 짜리 검은색 섬록암 비석을 발굴한다. 비석은 38만 점의 유물을 소장한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중이다. 고바빌로니아 왕국 함무라비(재위 B.C1790 –B.C1750년) 치세 때 수메르 쐐기문자를 차용해 셈족 아카드어로 만들어 수도 바빌론에 세웠던 282개 조항의 함무라비 법전이다.

함무라비 법전 발굴지. 이란 수사
함무라비 법전 발굴지. 이란 수사

◆ '눈에는 눈'의 동해(同害) 복수법(復讐法)

"자유인이 다른 자유인의 눈을 해치면 그의 눈도 해친다", 동해보복형(同害報復刑, 탈리오 법칙), 복수법(復讐法)의 전형을 보여준다. 쐐기문자는 이미 19세기 중반 해독된 상태여서 세일 연구팀은 1902년 법전을 즉시 풀어냈다. 시카고 대학 하퍼(R. F. HARPER) 박사가 1904년 펴낸 『바빌론왕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눈에는 눈' 조항은 196조다. 197조 내용도 비슷하다. "자유인의 뼈를 부러트리면 그 사람의 뼈를 부러트린다.

" 법의 역사를 좆는 탐방객은 루브르 박물관 리슐리외 전시관의 메소포타미아 전시실에서 4천년 전에도 사법부 판결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고심했던 법 조항에 적잖이 놀란다.

◆함무라비 법전 5조, 오심 판사 영구추방

함무라비 법전 5조를 읽어보자. "만약 판사가 판단해서 결정을 내리고, 이를 서명해 판결했는데 나중에 그 판결을 바꾸는 경우에는 판사가 자신이 내렸던 판결을 책임진다. 판결했던 벌금보다 12배로 물어낸다. 그 판사를 판사석에서 내쫓고, 다시는 판사석에 앉히지 않는다." 판사의 자의적 판결을 막기 위한 조항이다.

소포클레스. 대영박물관
소포클레스. 대영박물관

판사가 법률과 원칙에 입각하지 않고, 사적인 감정이나 개인 양심으로 판결하는 동서고금의 세태는 그리스 최고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2500년 전 금언을 되새겨준다. "이성은 신이 준 최고의 선물. 하지만, 증오나 좋아하는 마음을 가질 때 이성은 어이없이 무너진다". 정치적 편향에 좌지우지되는 판결은 레슬링 선수이자 미남으로 이름 높던 소포클레스의 말처럼 특정 정치인과 세력을 증오 혹은 맹종할 때 독버섯처럼 싹튼다.

아테네 아레오파고스 돌산에서 본 아크로폴리스.
아테네 아레오파고스 돌산에서 본 아크로폴리스.

◆아테네 민주정치, 귀족 사법부 아레오파고스

B.C 5세기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를 상연하던 그리스 수도 아네테로 가보자. 고대 그리스 문명의 보배와도 같은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의 현장, 아고라는 지금도 소포클레스나 소크라테스가 거닐던 길 그대로다. 아고라에서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으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 야트막한 돌산이 나온다. 아레오파고스(Arepagos)다.

고대 그리스어로 '아레스의 언덕(Hill of Ares)'이라는 의미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곳에서 올림포스 12신이 모여 아레스를 심판했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아레스가 큰아버지 포세이돈의 아들인 사촌 할리로티우스를 살해했다. 자신의 딸을 겁탈했다는 이유다.

공적 법체계가 아닌 사적 형벌 즉 린치(Lynch)를 가한 거다. 신들은 아레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이 장소는 아테네의 법정이 됐고, 아레오파고스는 곧 사법부를 의미했다. 기원 후 사도 바울이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 재판관 디오니시우스를 기독교도로 개종시켰다는 얘기도 전한다.

◆아레오파고스에서 디카스트(시민 배심원) 재판으로

사법부 아레오파고스 구성원은 귀족들이다. 재판은 귀족이나 부유층에 유리한 판결로 일관됐다. 재판거래가 횡행했고, 힘없는 일반 시민들은 재판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B.C 490년의 1차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 전투, B.C 480년 2차 페르시아 전쟁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의 침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낸 주역은 일반 시민이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 본 아레오파고스. 가운데 돌산이 아레오파고스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 본 아레오파고스. 가운데 돌산이 아레오파고스다.

전쟁이 터지면 시민이 군인으로 소집되는 제도 아래 시민 병사로 구성된 밀집대형의 팔랑크스 부대가 맹활약해 조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국가 보위의 주역, 시민이 권력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했다. 이미 B.C 508년 개혁을 통해 18세 이상 남성 시민들이 모든 정책과 법률을 결정하고 관료를 선출하는 제도를 갖췄다. 즉 입법권과 행정권을 시민 몫으로 만들었다.

이제 남은 하나, 몽테스키외가 3권 분립으로 정의했던 사법권도 일반 시민에게 넘겨주는 정치개혁이 이어졌다. B.C 462년 에피알테스가 주도한 개혁으로 재판권을 귀족 사법부 아레오파고스에서 디카스트( Dikast, 시민 배심원)가 판결하는 배심원 재판으로 바꿔 놓았다. 함무라비 법전의 판사 추방 조항과 같은 맥락이다. 시민이 3권을 갖는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클레로테리온. 디카스트(시민 배심원) 추첨 장치.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
클레로테리온. 디카스트(시민 배심원) 추첨 장치.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

◆디카스트 추첨 장치, 클레로테리온

아레오파고스에서 다시 아고라로 10분여 내려가면 웅장한 자태의 아탈로스 스토아에 이른다. 1953년 미국 석유 사업가 록펠러 가문이 돈을 대 3년 공사로 복원한 건물이다. 원래는 터키 서부 연안의 부국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2세가 젊은 시절 아테네에서 공부한 것에 감사 표시로 B.C 159년 착공해 21년 만에 완공한 이력을 갖는다. 지금은 아고라 박물관으로 전환돼 희귀 유물로 탐방객을 맞는다.

클레로테리온(Kleroterion). 디카스트를 추첨하는 장치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연초 6천 명의 배심원 후보자를 선정해 놓고, 재판 당일 아침 클레로테리온에서 추첨을 통해 201명~2500명의 디카스트를 뽑는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채택하는 시민 배심원 재판은 여기에 뿌리를 둔다.

국내 대기업과 미국 기업의 특허 분쟁에서 유무죄는 하버드 법학전문대학원 출신 판사가 결정하지 않는다. 시민 배심원들이 판결한다. 판사는 재판을 진행하고 유죄일 경우 형량만 정한다. 전 세계 민주국가 가운데 유례없는 사법부 판사 왕국의 오명을 이제 곰곰 되씹어 볼 시점이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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