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가 불러낸 신화 속 시지프스(시시포스)가 21세기 대한민국에 나타났다. '바위를 항상 산꼭대기에 있게 하라'는 신벌을 받은 시지프스는 온 힘을 다해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 올리지만 뾰족한 산꼭대기에 도달하는 순간 바위는 반대쪽으로 굴러떨어진다. 부당한 걸 알면서도 끝도 없이 반복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인 것이다.
카뮈는 이를 인생에 빗댔다. 세상이 말도 안 되는 일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얼마 없다. 그만 살거나, 초월적 존재에 귀의해 희망을 주조해 낼 수도 있으나, 가장 꼿꼿한 길은 절망하지 않고 삶을 계속 살아 내는 것이다.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부조리한 세상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할 일을 계속 하는 것, 이게 카뮈가 생각한 인간과 삶의 본질이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 한번씩 떠들쳐 봤을 시지프스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소환했다. 지난 17일 백현동 개발 비리 조사를 위해 검찰에 소환된 그는 "비틀어진 세상을 바로 펴는 것이 이번 생의 소명이라 믿는다. 기꺼이 시지프스가 되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검찰에 여러 번 소환된 것이 부당한 고초라 주장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비장해 보이려 애써도 덮을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세상을 바로잡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검찰에 불려 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그가 소명해야 하는 혐의는 뇌물과 배임, 선거법 위반 거짓말이다. 숭고함이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치사스럽고 다채로운 혐의들 때문에 바쁘게 불려 다니는 처지에 난데없이 웬 우국지사 행세를 하나.
더구나 그는 순교자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패거리 지향이다. 상황을 홀로 감당하려는 지도자라야 조금이나마 비장미가 스며 나올 텐데 도무지 결연함을 모른다. 그저 연출에 능할 뿐이다. 검찰 조사 하루 전 그는 검찰 출석의 시간과 장소를 블로그와 트위터에 공지했다. 극렬 지지자들은 당연히 소집령이라 느꼈을 것이며, 이 대표 본인이 그 점을 몰랐을 리 없다. 지지자들을 불러 모아 연호를 유도한 후, 고독한 시지프스가 되겠다고 단상 위에서 외쳤으니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거대한 부조리극이 펼쳐지고 있다. 그 극의 뼈대는 국민들을 기억상실자 취급하는 정치인들의 몰염치다. 좀스럽기 짝이 없는 개인 비리를 저질러 놓고는 마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나라를 구하는 저항을 하다 권력에 밉보인 양 우겨 댄다.
문서 위조 잡범 조국 전 장관은 얼마 전 "차라리 옛날처럼 나를 남산이나 남영동에 끌고 가서 고문하길 바란다"는 말로 쓴웃음을 자아냈다. 범죄 유형부터 안 어울린다는 것을 국민 누구도 잊지 않았는데 혼자만 드라마를 찍는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시지프스는 이런 꼴을 보며 견뎌야 하는 국민들이다. 개인적 삶은 깨끗하게, 공적인 삶은 헌신적으로 사는 정치 지도자를 보고 싶어 갈급증이 난 지 오래다. 사람이니 가끔 잘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깔끔하게 반성하고 책임지는 모습도 보고 싶어 미치겠다. 그런데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는 풍경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 보통 사람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치는 도덕성에다, 그것이 탄로 난 다음에는 마치 정적의 음모에 당한 것처럼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 천편일률적이다.
여기에 더해 한 해에 수백억 원씩 국가보조금을 받는 공당도 이 부조리극의 또 다른 주연이다. 당 대표의 개인 비리 수사를 당 대변인이 나서서 비난하며 옹호 논평을 내고, 한명 한명이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들이 검찰에 몰려가 호위 농성을 한다.
공직자답게 반듯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실수하면 반성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우리 국민에게는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려야 하는 큰 바위다. 공조직답게 공사를 구분하고 공적인 일을 하는 정당을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 대접을 받는다. 그러니 한국 정치라는 부조리극 속에서 절망을 거부하는 주연 시지프스는 바로 우리 국민이다.
사실 이따위 비장미가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시지프스의 바위가 아무리 크고 산꼭대기가 높아도, 산을 깎고 바위도 뽀개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이다. 건국 이후 그간 극복해 온 어려움이 얼마나 큰 바위들이었는지 떠올려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우리가 못 견뎌하는 이런 정치를 끝장내는 것도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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