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집에 오자마자 신발장 문을 열었다. 꿉꿉한 냄새가 확 밀려왔다. 가볍게 이는 먼지를 손으로 날리고 안쪽을 살폈다. 안 보였다. 쭈그려 앉아 한참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역시 버렸구나.
"이게 뭐야. 새 거도 아니잖아."
10살 때, 아버지가 회사 동료에게서 얻어온 인라인스케이트. 빨간 바탕에 군데군데 회색 칠이 된 중고였다. 그래도 220미리(mm) 작은 두 발에 꼭 들어맞았다. 투덜거린 것치곤 그걸 신고 열심히 연습해 처음 나간 대회서 우승도 했다. 그날 관중석에서 봤던 아버지는 눈꼬리와 입꼬리가 맞닿을 정도로 환히 웃고 있었다.
"미안해, 승희야. 나중엔 진짜 좋은 걸로 사줄게. 약속!"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료 비위를 맞춰가며, 자기 입으로 어려운 사정을 열심히 설명한 끝에 구해온 걸 테다. 그런 걸 왜 아무 생각 없이 버렸을까. 왜 그렇게 못되게 말했을까. 늦은 후회였다. 그 스케이트도, 아버지도 이제 영영 볼 수 없다. 그때보다 10미리 더 자란 발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형 보증 서주다 빚 떠맡은 남편, 교회서 괴롭힘 당해 정신 이상까지
유난히 작은 몸집에 말수가 적은 아이. 계은상(가명·46) 씨는 자세히 봐야 보이는 풀꽃 같은 사람이었다. 밭농사를 하는 부모님 아래 장녀로 태어나 밑으론 남동생이 셋, 여동생이 또 셋 있었다. 가세가 기운 건 중학생 때였다. 부모님은 할아버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땅을 팔았다. 그 무렵 아버지도 사고로 다리를 다쳤다. 장녀인 은상 씨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고향을 떠나 기숙사가 딸린 야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말이 학교지 그냥 공장에 취직한 거나 다름없었다. 3교대로 일하며 책은 일이 없을 때나 잠깐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힘들었다. 티는 안 냈다. 한날은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이모의 권유로 교회라는 곳에 가봤다. 고른 파동으로 울려 퍼지는 찬송가, 엄숙한 분위기 속 친절한 사람들, 그들이 말하는 희망과 사랑…. 모두 마음에 들었다. 남편을 만난 것도 꾸준히 다녔던 교회를 통해서였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할머니로부터 소개받은 남자로, 공장에서 쇠 깎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25살에 그와 결혼하고 1년 뒤 딸 승희(가명·22)를, 그 이듬해 아들 준범(가명·21)을 낳았다.
성실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들…. 처음 맛보는 행복이었다. 달콤한 만큼 쉽게 녹을 수 있단 것도, 그래서 처음 알았다. 남편에겐 사업을 하던 형이 하나 있었다. 그는 '장남' 값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에게서 그간 7천만원가량 돈을 빌려 가서 갚지도 않고, 허구한 날 술에 취한 채로 남편을 불러내 술값을 대신 내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은 승희가 9살이 됐을 무렵, 형 때문에 1천200만원 보증 빚까지 떠맡게 됐다. 원래도 빠듯했던 살림이 급격히 어려워졌다. 학원비 낼 여유가 없어 승희와 준범이는 학원을 그만뒀다. 빚 갚는 데 급급해 집세도 밀려 더 저렴한 월셋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러면서 은상 씨는 새집 근처에 있는 곳으로 교회를 옮겼다. 새 교회는 뭔가 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위 '사이비'였다. 교양 없는 교인들은 폭언과 뒷담화를 일삼고, 귀신을 내쫓는단 명목하에 예배실 안에서 가혹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폭력은 신참이자 소심했던 은상 씨에게 특히 집중됐다. 한때 유일한 구원이었던 교회가 지옥이 됐다. 얼마 안 가 교회를 그만뒀지만, 영혼은 여전히 그곳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부터 은상 씨는 자신을 괴롭혔던 교회 사람들의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들었다.
◆한평생 일만 하다 폐암으로 떠난 아빠… 돈도 없는데 2주 내로 새집 구해야
엄마는 변했다. 어린 승희 씨도 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과묵했지만 미묘하게 말수가 늘었다. 그중 대부분은 '사모가 마이크에 대고 나를 욕한다'거나 '교회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등 이해 안 되는 말뿐이었지만. 그 무렵 엄마의 배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복수가 찬 것이었다. CT 촬영을 위해 2016년 3월쯤 지역 대학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있던 중 엄마는 링거를 뽑고 도망갔다. 이유는 '사모가 쫓아와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결국 올해 7월이 돼서야 충수암 판정을 받고 제거 수술을 받았다.
천 씹은 지퍼처럼 엄마는 과거에 매여 멈춰버렸다. 그래도 승희 씨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아버지 덕이었다. 아버지는 아침 7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 잔업이 있는 날엔 밤 9시가 넘어 집에 돌아올 만큼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승희 씨의 초·중·고등학교 졸업식 3번 모두 꽃다발을 사 들고 참석할 정도로 딸을 사랑했다. 승희 씨가 인라인스케이트 대회를 나갈 때도 연차까지 쓰며 반드시 응원하러 오는 열성 팬이기도 했다.
언제까지나 승희 씨 편일 것 같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나타난 건 지난 3월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고, 오른팔이 부어올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래도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 한 달 뒤 걷는 것조차 힘들어졌을 때 비로소 병원을 찾았다. 폐암 4기 진단이 나왔다.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 골반 림프샘까지 전이된 상태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그렇게 아버진 지난 6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세였다. 평생 일만 열심히 해온 아버지께 왜 이런 비극이 닥친 걸까. 원망이 들끓었다. 이제 장녀인 승희 씨에게 남은 가족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엄마와 지적장애 남동생뿐이다. 용접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남동생은 현재 별거 중이며, 승희 씨는 아직 간호학과 2학년이라 학교에 다녀야 한다. 근로 소득이 전혀 없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 부조금으로 모인 400만원과 승희 씨가 학원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아껴가며 하루를 버티고 있다. 아버지 항암치료를 위해 친척에게 빌린 400만원을 아직 못 갚았기 때문에 주변에 손 벌릴 곳도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달 17일까지 새집을 구해야 한다. 17일에 사글세 250만원을 내고 계약을 연장하기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곰팡이로 가득 차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특히 거실처럼 쓰고 있는 큰 방은 두 쪽 벽면이 아예 그냥 곰팡이로 뒤덮인 상태다. 벽에 걸어 놓은 옷이나 근처에 있는 가구에까지 곰팡이가 다 번져 망가지기 일쑤였다. 임시방편으로 벽지를 붙여 놔도 봄이 되면 얼었던 물이 녹으면서 또다시 곰팡이가 생겼다.
오늘도 이사할 곳을 찾아 이곳저곳 동분서주하는 승희 씨. 최근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한 엄마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곰팡이 집'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쥐꼬리만 한 돈으로 쾌적한 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2학기 개학 전까진 찾고 싶은데…. 곰팡이로 뒤덮인 벽처럼 승희 씨의 마음도 새까맣게 문드러져 갔다.
*매일신문 이웃사랑은 매주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소중한 성금을 소개된 사연의 주인공에게 전액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성금을 전달하고 싶은 분은 하단 기자의 이메일로 문의하시길 바랍니다.
※ 이웃사랑 성금 보내실 곳
대구은행 069-05-024143-008 / 우체국 700039-02-532604
예금주 : (주)매일신문사(이웃사랑)
▶DGB대구은행 IM샵 바로가기
(https://www.dgb.co.kr/cms/app/imshop_guide.html)
https://www.dgb.co.kr/cms/app/imshop_guide.html
[지난주 성금내역]
◆미혼으로 살다 뒤늦게 딸 얻었지만 자폐성 장애 판정에 본인은 심장질환에 하반신 크게 다쳐 딸과 생이별한 민귀주 씨에게 2,970만원 전달
교통사고 크게 다쳐 홀로 키우던 딸(자폐성 장애아)을 보호시설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민귀주(매일신문 8월 8일자 10면) 씨에게 2천970만5천650원을 전달했습니다.
이 성금엔 ▷제일키네마섬유(이필남) 10만원 ▷김호근 5만원 ▷이상준 4만원 ▷임경숙 3만원 ▷이병규 2만5천원 ▷성민교 2만원 ▷신종욱 2만원 ▷박진숙 1만5천원 ▷진국성 1만5천원 ▷최정원 1만5천원 ▷최지원 1만5천원 ▷이진기 5천원 ▷'김명숙도움' 3천원이 더해졌습니다. 성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린 시절엔 아버지에게, 커서는 남편에게 가정폭력 당해왔으나 9개월된 아들만 보고 힘내려 하는데 자궁암 판정까지 받은 장소영 씨에게 2,194만원 성금
어린 시절엔 아버지에게, 커서는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해왔으나 9개월된 아들만 보고 힘내서 살아보려 했는데 자궁암 판정까지 받은 장소영 씨(매일신문 8월 22일자 10면)에게 51개 단체, 159명의 독자가 2천194만2천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성금을 보내주신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피에이치씨큰나무복지재단 200만원 ▷건화문화장학재단 150만원 ▷(주)대구은행 100만원 ▷빛명상본부 60만원 ▷(주)태원전기 50만원 ▷신라공업 50만원 ▷한라하우젠트 50만원 ▷㈜태린(배민경) 45만원 ▷최상규이비인후과 40만원 ▷성서한미병원(신홍관) 30만원 ▷㈜신행건설(정영화) 30만원 ▷(주)동아티오엘 25만원 ▷구미현대병원 25만원 ▷㈜백년가게국제의료기 25만원 ▷금강엘이디제작소(신철범) 20만원 ▷대백선교문화재단 20만원 ▷대창공업사 20만원 ▷(주)구마이엔씨(임창길) 10만원 ▷(주)삼이시스템 10만원 ▷(주)우주배관종합상사(김태룡) 10만원 ▷(주)이구팔육(김창화) 10만원 ▷경북행복재단(이욱열) 10만원 ▷경주천마운전전문확원 10만원 ▷기독교대한성결교회봉산교회(봉산교회) 10만원 ▷달서구약사회 10만원 ▷대구동양자동차운전전문학원(최우진) 10만원 ▷세움종합건설(조득환) 10만원 ▷신성산업(김용환) 10만원 ▷우가네 10만원 ▷우리들한의원(박원경) 10만원 ▷이재만 대구지방세무사회 회장 10만원 ▷창성정공(허만우) 10만원 ▷건천제일약국 5만원 ▷베드로안경원 5만원 ▷봉란옥(이순자) 5만원 ▷선진건설(주)(류시장) 5만원 ▷세무사박장덕사무소 5만원 ▷이전호세무사 5만원 ▷전피부과의원(전의식) 5만원 ▷정한건설 5만원 ▷참한우소갈비집(신동애) 5만원 ▷채성기약국(채성기) 5만원 ▷칠곡한빛치과의원(김형섭) 5만원 ▷피플라이프(박태호) 5만원 ▷현대전산인쇄(주)(이기복) 5만원 ▷흥국시멘트 5만원 ▷국선도풍각수련원 3만원 ▷매일신문구미형곡지국(방일철) 3만원 ▷청산(우창하) 3만원 ▷사단법인대한민국힐링문화진흥원 1만원 ▷하나회(김미라) 1만원
▷도경희 200만원 ▷김상태 이정추 각 100만원 ▷김진숙 50만원 ▷성현탁 이신덕 각 30만원 ▷김옥선 문심학 박철기 신금자 허금주 각 20만원 ▷곽용 안정원 이재일 전시형 조득환 최창규 허정원 각 10만원 ▷하경석 6만원 ▷김경호 김순향 박정희 변대석 서정오 서준교 신광련 안대용 윤순희 이강산 이경자 이정량 이종하 이진술 임채숙 전우식 정원수 천혜원 최상수 최영철 최종호 최한태 각 5만원 ▷서석호 4만원 ▷강명순 강민주 곽광옥 권규돈 김영수 김점숙 김태욱 김혜경 박승호 신윤경 이대성 이석우 이재열 이준희 정희영 조영호 최춘희 한명환 각 3만원 ▷권오영 김민호 김복만 김재연 문서하 박기영 서숙영 송재일 안현준 우병례 이인철 이장호 이재민 이해수 정미라 정의관 정주현 조혜란 최미향 최선태 각 2만원 ▷김갑용 정용갑 각 1만5천원 ▷강경련 강농자 강병구 권령경 권오현 권유진 김경진 김귀동 김다영 김도영 김성옥 김성진 김영희 김우봉 김은영 김종식 김지현 김태천 남명호 박미화 박인배 박태용 박홍선 배상영 석미혜 우순화 유귀녀 유명희 윤태석 이영수 이운대 정서원 정승은 조영식 주수민 지호열 최경철 최병철 각 1만원 ▷권두형 김현숙 류시배 문민성 윤인주 이순덕 이승민 전지원 정유미 조용인 조철제 각 5천원 ▷권두영 문민성 각 3천원 ▷이장윤 2천원 ▷김기만 심금자 최연준 각 1천원
▷'주님께감사' 14만원 ▷'범물동김선우' '사랑나눔624' '주님사랑' 각 10만원 ▷'대한민국잘풀리' '민호네' '재원수진' 각 5만원 ▷'구상희(장소영씨)' 3만4천원 ▷'민호엄마힘내세요' '익명' 각 3만원 ▷'석희석주' '소영씨 힘내요' '이웃사랑성금' '익명' 각 2만원 ▷'무명' '조희수힘내세요' '좋은곳에써주세' '지현이동환이' 각 1만원 ▷'주' 5천원 ▷'본리초2학년이재경' 3천원 ▷'지성이' '채영이' 각 2천원
댓글 많은 뉴스
한동훈 이틀 연속 '소신 정치' 선언에…여당 중진들 '무모한 관종정치'
국가 위기에도 정쟁 골몰하는 野 대표, 한술 더뜨는 與 대표
비수도권 강타한 대출 규제…서울·수도권 집값 오를 동안 비수도권은 하락
[매일칼럼] 한동훈 방식은 필패한다
"김건희 특검법, 대통령 거부로 재표결 시 이탈표 더 늘 것" 박주민이 내다본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