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서문시장을 찾았던 윤석열 대통령도, 그를 비판하는 시국 집회 지도자도 대구경북을 '보수의 땅'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서로 맥락은 다르다. 전자는 자랑의 의미로, 후자는 성찰의 취지로 그렇게 쓰는 것 같다. 보수 진영에 이곳은 '성지'다. 윤 대통령의 표현대로 '이곳에 오기만 하면 아픈 것도 다 낫고 힘이 솟구치는' 성령의 세례 장소다. 진보 진영에 이곳은 깨끗하지도 어질지도 그리고 현명하지도 않은 지도자에게 포획된 '버림받은' 동토이다.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어' 해방해야 할 겨울 공화국이다.
보수의 성지라고 하든 보수의 심장이라고 하든 보수와 진보 진영이 다 같이 호명하고 있는 '보수의 땅'이라는 말이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정치적으로 이 지역의 대표 권력은 보수 일색이다. 하나의 정당이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남아선호 비율,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 등의 지표에서 이 지역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보수적 경향을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지역의 특성을 표현하는 '대구경북의 정체성은 보수다'라는 명제를 당연시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보수의 땅'을 불러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느 맥락으로도 이런 말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정체성이란 첫째, 단일하지 않다. 둘째, 불변이 아니다. 셋째, 결정론적으로 볼 일이 아니다.
첫째, 정체성이 단일하지 않다는 말은 혼종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를 예로 들면 보수적 성향이 지배적이기는 하나 대구경북 안에는 자유주의적 성향, 진보적 성향 등 문화적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세대 효과에 의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젊은 세대는 보수성, 지역성이라는 구조적 제약을 벗어나 분방하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둘째, 불변이 아니라는 말은 무릇 어떤 지역의 정체성이란 시간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구경북은 보수의 땅이었던 때도 있었고 자유와 진보의 선봉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1946년 10월 항쟁, 1956년 정부통령 선거, 1960년 2·28민주운동 등에서 보인 이 지역의 움직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후자의 사례라 하겠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정체성은 변화하는 것이다.
셋째, 결정론적으로 볼 일이 아니라는 말은 정체성이란 구조적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라는 얘기다. 그동안 우리 지역의 보수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분지와 같은 자연환경 구조, 자소작농 중심이라는 경제구조, 근대화론에서 말하는 사회구조. 이런 구조적 요인들이 이 지역의 보수성을 결정했다는 얘기인데, 모두 설명에 한계가 있다. 정체성은 구조적으로 결정된다기보다 행위 주체의 정치 사회적 실천으로 만들어지는 헤게모니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이 지역을 '보수의 땅'이라고 쉽게 호명하는 것이 어떨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긍정적 동기이든 부정적 취지이든 '보수의 땅'이란 규정은 우리 내부적으로는 이미지의 자기 강화를 통해, 외부적으로는 낙인효과를 통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세계 모든 도시의 발전 조건은 문화적 다양성이라 한다. 다양성이 큰 곳이 개방성이 큰 곳이고 역동성 또한 크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보수의 땅'을 자임한다면 누가 우리 지역에 와서 살려고 할 것이며 누가 우리 지역 젊은이들에게 매력을 가질 것인가? '보수의 땅'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다면 우리 아이들이 결혼하고 취직하는 데 어려움이 클 것이 아닌가? 이런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칭찬의 의미이든, 성찰의 취지이든 스스로 우리 지역을 '보수의 성지' '보수의 심장'이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우리 지역의 정체성은 혼종성, 유동성, 역동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다고 말하고 그렇게 생각해야 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야 우리 지역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평판이 생기고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지 않을까? 다양한 가치가 서로를 존중하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있는 지역을 꿈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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