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마로니에? 내 이름은 칠엽수!

경주 경북천년숲정원의 칠엽수 가로수길. 경북천년숲정원 제공
경주 경북천년숲정원의 칠엽수 가로수길. 경북천년숲정원 제공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

덧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길의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1970년대에 유행한 박건의 노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가사 2절이다. 슬픈 듯 감미롭게 파고드는 감성적인 가사와 호소력 진한 선율 덕분에 가을과 마로니에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낭만과 추억을 떠올린다. 이 노랫말의 의미를 알고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사람의 연배는 적어도 초로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대중가요의 영향력 때문일까. 마로니에라는 이름은 알지만 '가시칠엽수'라는 다른 이름은 낯설다. 마치 라일락은 잘 알면서 '서양수수꽃다리'라고 말하면 생경하게 느끼는 것처럼 대중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칠엽수는 이름 그대로 나뭇잎이 일곱 장이다. 어쩌다 다섯 장, 아홉 장짜리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일곱 장의 잎사귀를 매달고 있다.

◆파리의 명물 가로수 마로니에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돌궐족(突厥族)으로 알려진 튀르크족은 말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했다. 말이 쉽게 숨차서 헐떡거리며 침을 흘리는 폐기종을 앓을 때 그들은 밤처럼 생긴 큰 열매 '말밤'(horse chestnut)을 먹였다. 프랑스에서는 말밤을 '마롱'(marron), 그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마로니에'(marronnier)라 불렀다. 바로 '서양칠엽수' 혹은 '가시칠엽수'의 다른 이름이다.

발칸반도가 원산지인 마로니에가 유럽으로 퍼진 계기는 프랑스가 가로수로 심은 이후부터다. 잎이 크고 나무의 수형은 단순한 편이다. 파리 북부 몽마르트르 언덕과 센강을 따라 뻗어 있는 샹젤리제 거리의 마로니에 가로수는 파리의 명물이다.

센강 변의 배들, 물에 비친 배 그림자 순간마다 달라지고 웬 마로니에는 그렇게 많은 꽃燈(등)을 세우는지, 그 꽃燈 뒤에 무엇이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고 싶지만 무서움은 다만 내게 있고 흐르는 노래는 옛날 노래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이하 생략).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2000)

이성복 시인이 파리에 머물면서 지은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0」이다. 연작시에는 마로니에를 여러 차례 소환해 시내 풍광을 읊으면서 이방인의 깊은 소회를 담았다.

아무튼 해마다 잎을 잔뜩 펼쳐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녹음 덕분에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 히말라야시더(개잎갈나무), 은행나무 등과 함께 세계적 가로수로 꼽힌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마로니에는 서울 덕수궁 평성문(平成門) 앞에 아름드리 거목으로 성장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한 네덜란드 공사가 1912년 회갑을 맞은 고종을 위로하기 위해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하니 최소 110살은 넘는다. 이후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가 일본 특산의 칠엽수를 들여와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캠퍼스에 심으면서 국내에 보급됐다.

◆경북천년숲정원의 칠엽수길 장관

국내에 유럽 마로니에, 즉 가시칠엽수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구경북에는 대부분이 일본의 칠엽수다. 일제강점기 때 유럽에서 왔든 일본에서 왔든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에 나오는 나무 이름은 칠엽수다. 줄기가 쭉쭉 뻗어 키가 30m까지 자라며 사방으로 가지를 넓게 펴는 수형이나 널따란 잎의 형태는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굳이 칠엽수와 가시칠엽수를 구분하자면 열매에서 결정적 차이를 찾을 수 있다. 칠엽수 열매에는 가시의 흔적만 남아 있고 잎의 뒷면에 적갈색 털이 있는 반면 가시칠엽수는 열매 표면에 가시가 촘촘히 돋아 있고 잎 뒷면에 털이 거의 없다.

칠엽수 꽃
칠엽수 꽃

칠엽수는 5월쯤 가지 끝에 원뿔 모양의 꽃차례가 하늘을 향해 달린다. 꽃대 하나에 100개에서 300개 정도의 작은 유백색 꽃이 모여 있어 인상적이다. 꽃말이 '박애'인 칠엽수는 달콤한 꿀을 아낌없이 준다. 꿀샘이 깊고 양도 많아서 최근 밀원식물로 인기다. 꽃이 피는 초기에는 벌을 유혹하기 위해 꽃잎 중간에 노란색의 허니 가이드(honey guide)가 발달하고 꿀 분비가 끝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밀원식물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산림청 산하 국립산림과학원이 최근 밀원 가치를 평가한 결과, 아까시나무보다 꿀 생산량이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1㏊ 면적에 칠엽수 80그루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약 64㎏의 꿀 생산이 가능한데 이는 아까시나무의 38㎏보다 1.7배 많다고 한다. 가로수, 조경수, 녹음수로 각광받아 온 칠엽수가 밀원식물로도 명성을 더 높일 것 같다.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자락에 올해 4월에 개장한 경북도 제1호 지방정원인 '경북천년숲정원'에는 300m나 되는 칠엽수 가로수길이 펼쳐져 있다. 30년 넘는 칠엽수 170여 그루가 길 가장자리에 심어져 기다란 터널을 이루고 있어 장관이다. 경산시 영남대학교 캠퍼스 천마로에 도열하듯이 서 있는 칠엽수의 넓은 잎사귀는 여름 뙤약볕을 피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그늘을 제공한다.

대구에서는 팔공산톨게이트로 가는 불로지하차도 부근과 황금고가교에서 두리봉터널로 이어지는 청수로, 범어공원 능선 일부, 대구어린이세상(어린이회관) 정원, 계명대 성서 캠퍼스 등에 크고 작은 칠엽수 수십 그루가 미관을 푸르게 장식하고 '대프리카'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있다.

대구어린이세상 공원의 칠엽수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대구어린이세상 공원의 칠엽수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칠엽수 종자와 열매 껍질
칠엽수 종자와 열매 껍질

◆독성 있는 열매 조심

9월에 접어들면 꽃자리에 골프공만 한 열매가 주렁주렁 황갈색을 띠며 탐스럽게 익는다. 땅에 떨어져 껍질이 벌어지면 밤처럼 생긴 종자가 나온다. 대구수목원 등은 이맘때쯤 칠엽수 열매를 먹지 말라는 안내문을 곳곳에 나붙인다. 사포닌, 글루코사이드, 타닌 등 물질이 사람에게 독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열매를 날것으로 먹으면 구토와 설사를 일으키게 되고 심하면 위경련 등 위장에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칠엽수를 도치노키(とちのき)라고 부르고 한자로는 栃(회)·橡(상) 자로 쓴다. 식량 여유가 없던 시절 칠엽수가 많은 곳에서는 가을에 열매를 주워서 향토식품으로 이용해 왔는데 이를 이용하여 만든 떡의 이름이 바로 도치모치(栃餅)다.

유럽에서는 칠엽수 열매 추출물을 옛날부터 치질·자궁 출혈 등의 치료약으로 사용해 왔으며 최근에는 동맥경화증이나 부스럼으로 부어오른 종창(腫脹)의 치료에도 쓴다고 한다.

◆낭만과 사색의 그늘 제공

10월의 따가운 가을 햇살은 녹음의 커다란 잎사귀들을 시나브로 누렇게 물들인다. 11월엔 아예 갈색으로 바싹 굽다시피 한다. 마로니에가 늘어선 길에는 구수한 낭만과 예술적 영감이 묻어나는 것 같다.

가을 적갈색으로 불든 칠엽수 잎.
가을 적갈색으로 불든 칠엽수 잎.

많은 예술가들이 담론을 나눈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유명한 화가들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여 마로니에를 태워 만든 목탄으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마로니에 넓은 잎이 피고 지는 언덕에서 화가들이 만나 교감하고 예술혼을 꽃피웠다.

특히 네덜란드 출신의 빈센트 반 고흐는 뛰어난 예술적 비전과 강렬한 감정을 세상에 선물했다. 「꽃이 핀 마로니에 나무」(Blossoming Marronnier Tree)는 그의 천재성이 담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파리의 풍경화 중에서 유화 「꽃이 핀 마로니에 나뭇가지」가 있다.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했던 고흐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1890년 퇴원한 뒤 파리 근교로 이사하고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린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문학적으로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는 소설 『구토』에서 마로니에에 빗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철학을 담았다.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 아이들처럼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하려는 순간 구토증을 나타내더니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같은 증상을 보이게 된다. 공원 벤치에 앉아 바라본 마로니에의 뿌리도 마찬가지로 구토 대상이었다. 마로니에 나무는 본질을 못 밝혀도 그 자리에 이미 우두커니 서 있다. 로캉탱은 마로니에를 보고 모든 것은 존재의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곳에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반면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프랑크나무'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박해를 피해 25개월간 은신한 소녀에게 희망과 위로를 안겨준 나무였다. 1944년 8월 체포돼 수용소에서 16세 나이로 숨진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일기에서 언급했던 '밤나무'는 말밤나무의 준말이며 마로니에다. 그 나무는 2010년 폭풍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폐 속의 답답한 공기를 날려 보내고 싶어서, 나는 거의 매일 아침 다락방으로 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푸른 하늘과 벌거벗은 밤나무를 올려다본다. 밤나무의 가지에 맺힌 빗방울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갈매기와 새들은 바람 위로 미끄러지듯 날아간다. 이것들이 존재하는 한, 난 아마 살아남아서 이걸 볼 수 있을 것이고, 이것들이 있는 한, 나는 불행할 수 없다."(1944년 2월 23일)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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