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문환의 세계사]흑인 클레오파트라? 그리스 출신 금발 백인 여왕

알렉산더 사후 300년간 이집트엔 그리스 혈통 백인 왕조가

이수스 전투 현장을 묘사한 장면. B.C4세기. 알렉산더 석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이수스 전투 현장을 묘사한 장면. B.C4세기. 알렉산더 석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흑인 클레오파트라? 얼마전 세계적인 OTT 업체가 클레오파트라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흑인 연기자를 등장시켜 클레오파트라 역할을 맡겼다. 고대 아프리카 국가 여왕 역에 흑인 여성을 맡긴 게 문제인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집트는 아프리카에 있지만, 흑인의 나라가 아니다. 피부색이 희지는 않지만, 백인종에 속한다. 고대 이집트 원주민의 직계 후손인 이집트 콥트교도들이 그렇다.

7세기 이후 이슬람 보급과정에 아랍인도 상당수 혼혈됐다. 물론 이집트에 가면 남부 지역의 경우 수단에서 올라온 흑인 혈통의 주민들이 있지만, 이집트의 주력은 아니다. 무엇보다 클레오파트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B.C 1세기 이집트 왕조는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전통 이집트인이 아니다. 북아프리카 토착 베르베르 족도, 아랍민족도 아니다. 그리스 혈통이다. 흰 피부에 금발의 백인이 지배하던 나라 B.C 4세기 말에서 B.C1세기 말 이집트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클레오파트라 1세 조각.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왕비.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모후로 역사적으로 이름 높은 클레오파트라 7세의 고조할머니다. 루브르 박물관.
클레오파트라 1세 조각.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왕비.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모후로 역사적으로 이름 높은 클레오파트라 7세의 고조할머니다. 루브르 박물관.

◆할리우드 영화의 역사 왜곡 캐스팅

클레오파트라 영화의 원조. 지금은 고인이 된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출연 [클레오파트라]. 1967년 작이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백인이어서 피부색은 문제가 안됐다. 그때는 머리가 문제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칠흙같은 검은 머리로 분장했다.

2006년 개봉한 [300]은 내용보다 우리 사회에 식스팩 신드롬으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영화다. 이 영화에 페르시아 제국 왕 크세르크세스 1세로 등장한 배역은 브라질 출신의 호드리구 산토루였다. 백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기괴한 분장의 흑인으로 묘사했다. 페르시아는 이란이다. 금발은 아니지만, 인도 유럽어족의 오늘날 서양인과 뿌리가 같은 백인이다.

2년 앞서 개봉한 2004년 영화 [알렉산더]는 한술 더 뜬다. 여기에서 알렉산더의 첫 번째 부인 록사나 역을 흑인 여배우 로사리오 도슨이 맡았다. 록사나의 고향은 요즘으로 치면 우즈베키스탄, 당시 소그디아나라고 불렀다. 페르시아 제국의 소그디아나 영주 옥시테르아스의 딸 록사나와 결혼한 게 알렉산더의 첫 결혼이다.

록사나는 알렉산더 사후 알렉산더의 유일한 혈육을 출산했다. '빛나는 아름다움'이란 뜻의 록사나는 전형적인 이란계열 백인 여성이다.

알렉산더 석관. 알렉산더의 이수스 전투 장면을 묘사한 석관이어서 알렉산더 석관이라 부른다. 알렉산더 왕의 석관은 아니다. B.C4세기.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알렉산더 석관. 알렉산더의 이수스 전투 장면을 묘사한 석관이어서 알렉산더 석관이라 부른다. 알렉산더 왕의 석관은 아니다. B.C4세기.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알렉산더 B.C333년 이집트 정복 그리스인 통치 시작

흑인 논란에 휩싸인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원정과 관련된다. B.C 334년 알렉산더가 올림포스산 아래 디온에서 출정식을 갖고 페르시아 원정을 떠난다. B.C 333년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지역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을 크게 무찌른다.

다리우스 3세의 모후와 왕비, 딸들을 포로로 잡는다. 알렉산더는 훗날 이 딸 가운데 한 명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인다. 알렉산더는 지중해 동안 페니키아 지방(현재 레바논)을 정복하고, 가자 지구를 거쳐 꿈의 이집트에 B.C332년 무혈입성한다. 이 지역들은 모두 페르시아가 정복, 지배하던 땅이었다. 이제 지배자가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로 바뀐 거다.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더의 지시로 건설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수도가 됐다.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더의 지시로 건설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수도가 됐다.

알렉산더는 자신을 올림포스 12신의 최고신, 제우스의 아들로 여겼다. 그리스인들은 신의 뜻을 묻는 최고의 신탁 장소로 파르나소스산 델포이를 신성시했다. 국가 중요 중대사는 델포이 아폴론 신전 신탁소에서 여신관 피티아가 들려주는 신탁에 좌지우지됐다. 이집트의 최고신은 태양신 아몬이고, 이집트인들이 아몬신의 뜻을 전달받는 최고의 신전으로 삼는 곳은 서부 리비아 국경 사막지대 시와 오아시스 아몬 신전이다.

페르시아 압제로부터 이집트를 해방시켰다고 자부한 알렉산더는 단숨에 시와 아몬 신전으로 달려간다. 알렉산더가 아몬 신전에 다녀온 뒤, 아몬 신전 신관은 알렉산더가 태양신 아몬의 아들임을 선포한다. 알렉산더가 아몬신의 아들로서 이집트의 파라오임을 선포한 거다. 겁먹은 신관들의 자발적인 헌사인지, 아몬의 감응인지는 알 수 없다.

그토록 갈망하던 '신의 아들'이란 신탁에 고무된 알렉산더는 고대 이집트 역사 도시 멤피스로 가서 성대한 아몬 신전 행사를 개최한다. 이집트 파라오로 등극하는 자리였다. 이 무렵 다리우스 3세가 대군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알렉산더는 군대를 돌려 이라크 북부 오늘날 티그리스강 북단으로 간다. 알렉산더는 이곳 과가멜라 전투에서 B.C331년 다리우스 3세 군대를 궤멸시키며 페르시아 제국을 붕괴시킨다. .

프톨레마이오스 1세. 루브르 박물관
프톨레마이오스 1세. 루브르 박물관

◆알렉산더 사후 B.C323년 프톨레마이오스 장군 이집트 지배

유프라테스강변의 유서 깊은 역사고도 바빌론에서 B.C323년 33살의 알렉산더가 심포지온 도중 술을 마시다 쓰러져 10일 만에 숨을 거둔다. 부하장군들은 후계자 디아도코이(Diadochoi)를 자칭하며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다툰다. B.C323년 부하 장군들은 바빌론의 분할(Partition of Babylon)에 합의했고, 여기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이집트 총독으로 이집트를 맡는다.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은 알렉산더보다 11살 연상이었지만, 알렉산더를 호위하는 7명의 핵심 부하 소마토필라케스(somatophylakes)의 일원으로 숱한 전장에서 알렉산더를 호위하며 승리를 일궈낸 주역이었다.

마케도니아 전통에서는 선왕의 장례식을 치러준 인물이 후임 왕자리를 요구할 명분을 얻는다. 마케도니아 왕실 묘지는 그리스 북부 아이가이(현재 베르기나)였고, 알렉산더의 부친 필리포스 2세도 그곳에 묻혔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이집트 시와 오아시스 제우스 아몬 신전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 총독이 된 프톨레마이오스는 왕이 되고픈 욕망이 있었고,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B.C322년 마케도니아 아이가이로 운구되던 알렉산더 시신을 탈취해 이집트로 가져온다. 알렉산더 시신은 사후 즉시 이집트에서 미라 기술자를 불러 미라처리를 한 상태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렇게 명분을 획득한 뒤, 숱한 전투를 치르며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B.C305년 이집트 왕을 선언하며 프톨레마이오스 1세로 이집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연다. 당시 이집트는 비옥한 나일강 하구 덕에 지중해 최대 부국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비. 클레오파트라의 조상이다. 루브르 박물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비. 클레오파트라의 조상이다. 루브르 박물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8대손 클레오파트라 여왕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은 이집트 총독이 되자마자 이집트 지배자로서 정통성 확보를 위해 토착 이집트 3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넥타네보 2세의 딸과 B.C 322년 결혼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가 총애하며 10년 원정기간 동안 데리고 다니던 헤타이라(고대 그리스의 기생) 타이스를 사랑해 데려왔지만, 결혼대상일 수는 없었다.

이집트 공주의 역할은 곧 막을 내린다. B.C 320년 당시 본국 마케도니아의 실권자이던 제국 섭정 안티파트로스의 딸 에우리디케와 재혼한다. 이집트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한 두 번째 정략이었다. 이집트 여인은 뒷방으로 밀렸다. 에우리디케와 4명의 자식을 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하지만, 한 명의 여인을 더 가까이한다. 왕비 에우리디케의 시녀인 과부 베레니케다. 그녀와 3명의 자식을 더 본다. 이집트 여인을 밀어냈던 에우리디케는 시녀 베레니케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비 모자이크. B.C2세기. 알렉산드리아 고고학 박물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비 모자이크. B.C2세기. 알렉산드리아 고고학 박물관

84살까지 살았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제위 말년 10여 명의 자식 가운데 베레니케가 낳은 아들 가운데 한 명을 공동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2세로 삼고 제위를 물려줬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철저한 족내혼, 혹은 알렉산더의 제국을 분할 통치한 다른 마케도니아 왕조 구성원과만 결혼한다. 철저하게 마케도니아 순수 백인 혈통을 유지한다.

클레오파트라 조각. 이집트 전통 파라오 차림이다. 상트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쥬 박물관
클레오파트라 조각. 이집트 전통 파라오 차림이다. 상트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쥬 박물관

국민은 이집트인, 왕실은 마케도니아 백인의 2원 구조가 300년간 이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의 7대손이 프톨레마이오스 12세다. 그 딸이 클레오파트라 7세, 역사에 널리 알려진 클레오파트라 여왕(B.C70년-B.C30년)이다. 알렉산더 부하 장군으로 이집트에 왕조를 연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8대손이다. 100% 그리스계 백인이다. 파란만장했던 클레오파트라의 삶과 사랑, 권력투쟁, 그리스 문명 수호자로서 면모는 다음 기회에 다룬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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