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37>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아델라이데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유디 메뉴힌, 아델라이데 협주곡. 서영처 교수 제공
유디 메뉴힌, 아델라이데 협주곡. 서영처 교수 제공

아무도 없었다 맑은 하늘색 같은 커튼을 미풍이 건드리고 있었다/ 바깥으론 몇 군데 장미꽃이 피어 있었다/ 실내엔 색깔이 선명한/ 예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널찍하고 길다란 하얀 탁자 하나와 몇 개의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먼지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딴 나라에 온 것 같았다/ 자주 드나들면서/ 매끈거리는 의자에 앉아 보기도 하고 과자 조각을 먹으면서 탁자 위에 뒹굴기도 했다/ 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다/ 거기가 어딘 줄 아느냐고/ '안치실' 연거푸 머리를 쥐어박히면서 무슨 말인지 몰랐다. - 김종삼, 「아델라이데」 부분

시인에게 죽음은 공포보다 매혹으로 이끄는 통로다. 그에게 죽음은 모성적 편안함과 안락함의 공간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그를 정화된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음악이다. 시인이 말하는 공명은 천진한 삶과 죽음이라는 양극이 함께 만들어내는 공명이며, '아델라이데'의 선율이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음향의 세계다. 시와 음악 사이의 거리감 또한 아무도 없는 안치실만큼이나 넓은 공명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바이올린 협주곡 '아델라이데'는 모차르트가 7살 때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루이 15세의 장녀 아델라이데 공주에게 헌정한 곡이다. 악보에는 모차르트의 헌정사(1766년 5월 26일 베르사이유)가 적혀있다. 아델라이데 공주는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시인은 아델라이데 공주를 향한 모차르트의 마음, 혹은 공주를 묘사하고 있는 듯한 바이올린의 선율을 통해 고귀한 아름다움의 전형을 경험한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 죽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음악만이 오롯이 남아 이미지와 청각이 어울어지는 공명을 전달한다.

시인은 안치실의 경험으로 아름다움과 죽음의 문제를 풀어낸다. 그에게 죽음은 존재가 충족되는 곳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죽음에 대한 낭만적 동경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아름다움은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의 형태이며 완전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정신의 세계로 도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에게도 시인에게도 '아델라이데'는 낙원의 이미지를 표방한다. 음악을 절대미로 인식한 시인에게 '아델라이데'는 순수한 영혼의 상징이다. 그러나 순수란 언제든 오염될 가능성을 지닌 불안정한 것이다. 시인은 죽음을 미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며 음악으로 정화되는 세계를 제시한다. 이것은 그가 음악으로 세속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에게 아름다움과 죽음, 음악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근친적 유대감을 통해 동일한 의미를 갖는 기표가 되고 있다.

'아델라이데 협주곡'은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배우는 곡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곡이 아니라는 설 때문에 유디 메뉴힌의 것 외에는 음반이 별반 없다. 오랜만에 바이올린을 꺼내 활을 조여 본다. 아름다운 선율로 화한 아델라이데 공주, 그녀가 불러일으키는 환상 속으로, 순수한 영혼들이 살았던 한 시대 속으로 들어간다.

마담에게

저의 졸작을 당신의 위대한 재능으로 연주하는 영광을 허락하신다면 저는 다시 한번 당신의 호의에 압도될 것입니다. 만일 인자하신 눈길로 저의 작품을 끝까지 보아주신다면 당신의 관대함과 친절이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아델라이데라는 이름으로 이 모든 노력을 빛나게 해주신다면 진심으로 마음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당신의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매우 작은 하인인 저는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끝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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