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재현장] 학교는 무균실이 아니다

윤정훈 사회부 기자

윤정훈 사회부 기자
윤정훈 사회부 기자

부끄럼 많은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 무렵 나는 글을 잘 쓴다는 '뽕'에 한창 취해 있었는데, 이는 5학년이 되면서 정점을 찍었다. 그날 수업은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이때 나는 원고지를 돌려 세로쓰기로 적고, 굳이 쓸 필요 없는 어려운 한자를 남발하고, 글씨도 일부러 날려 썼다. 다 쓴 편지를 담임선생님께 제출하고 칭찬받을 순간만 기다렸다.

며칠 뒤 텃밭에 있는 방울토마토를 가꾸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이 넌지시 다가와 말했다. "정훈이는 너무 어른들 흉내를 내며 글을 쓴다"고. 당시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 덕에 비대해진 자아를 극복하고, 좀 더 솔직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그때 그 선생님이 '정서적 아동학대'를 우려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더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7월 서울 서이초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을 계기로 교권 침해에 대한 교사들의 분노가 전례 없이 표출되고 있다. 서이초 교사의 49재를 맞은 이달 4일 전국 곳곳에서 열린 추모 집회에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교사가 모였다.

교사들의 분노가 쌓인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학부모들의 무분별한 아동학대 신고다. 현행법에 따라 교사에 의한 아동학대 신고가 발생하면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일단 학교장이 수사기관에 즉시 신고해야 한다. 이후 신고당한 교사는 수업 배제나 직위해제 등 해당 아동과 분리 조치된다.

일부 학부모는 아동학대 신고를 무기로 교사를 위협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다. 취재 과정에서 수업을 시작해도 교실에 들어가지 않는 학생의 팔을 가볍게 밀친 것만으로 아동학대로 신고되거나 생활통지표에 적힌 일부 부정적인 표현을 문제 삼으며 담임교사를 정서적 아동학대로 신고한 학부모 등 별별 경우를 다봤다.

많은 사례를 접하며 느낀 점은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는 학부모들의 심리 기저엔 아이를 '무균실'에서 키워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2020년 정인이 사건 등 나라 전체를 경악시킨 일련의 아동학대 사건들을 통해 아동 인권에 대한 의식 수준도 점점 높아져 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동 인권이 '모든 아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지지받아야 하며, 어떠한 시련에도 노출돼선 안 된다'는 식으로 과잉 해석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볍게는 학생들을 경쟁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청군·백군을 없애고 점수 집계를 하지 않는 운동회의 등장을 예로 들 수 있다. 무겁게는 자녀가 다른 학생의 뺨을 때린 상황에서도 지지받기를 바라면서, 오히려 반 아이들 앞에서 자녀를 혼냈다고 교사를 탓하는 학부모의 사례가 이에 속한다.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애써 학교를 무균실로 만들려 한들, 어차피 현실은 온갖 세균들로 가득하기에 소용이 없다. 무균실에서만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왔을 때 작은 세균에도 쉽게 다치고, 분노하고, 패닉에 빠지는 연약한 개체가 된다.

현재 교사가 정당한 학생 지도를 하다가 아동학대 혐의로 무분별하게 신고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법 등 '교권 회복 4법'이 지난달 말 국회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해 상임위 전체회의와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다.

학생들이 '무균실'이 아닌 '예비 사회'에서 제대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관련 법안이 조속히 통과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