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호남 의병장 반장(返葬) 100년

정인열 대구가톨릭대학교 프란치스코칼리지 부교수

정인열 대구가톨릭대학교 프란치스코칼리지 부교수
정인열 대구가톨릭대학교 프란치스코칼리지 부교수

"숙부 이름은 규홍이고… 대구 지역의 남녀들이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옛날부터 충절스러운 일에 목숨을 바쳐 죽었으면서도 묘지가 없는 슬픈 이야기를 쏟아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사람들이 모두 장군의 의열을 칭하면서 숙부님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드렸습니다. … 멀리 대구까지 갈 만한 자재와 양식을 조달할 방법이 없으니, 숙부님의 영구(靈柩)를 고향으로 모셔올 계책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외로운 무덤에 한 잔 술이라는 것은 황폐한 들판에 이슬비뿐입니다. …다행스럽게 가련한 마음을 베풀어, 넉넉한 은혜가 이역 땅에서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혼령을 고향 땅으로 되돌아오게 했으며 매우 천만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

필자는 2020년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라는 책을 쓰고 2021년 개정판을 낸 적이 있다. 오늘날 대구 도심의 삼덕교회에 위치하다 지금은 없어진 옛 대구감옥(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206명의 명단을 파악한 자료집이다. 이후 필자는 2021년 호남의 안규홍 의병장 증손자(안병진)로부터 귀한 자료를 받았다. 바로 안 의병장이 대구감옥에서 사형 집행 뒤 버려진 시신을 거두고 무덤까지 만들어준 대구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사연을 적은 기록이었다.

안 의병장은 광주지방재판소에 이어 대구의 공소원(당시 대구공소원은 영호남과 제주도, 충청·강원도 일부까지 관할)에서 사형이 선고돼 1910년 6월 22일 32세로 순국했다. 일제는 시신을 버렸고 대구 사람들은 시신을 거두어 안장했다. 일제는 1911년 5월 5일에야 유족에게 사형 집행을 알렸다. 유족들은 대구에서 겨우 묘소를 확인했으나 1923년에야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이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김)할 수 있었다. 영호남 지역 300여 명이 도움을 보탰다. 그들 명단과 반장의 기록이 필자가 받은 '대구반장시부의록'(大邱返葬時賻儀錄)이었다.

호남 의병장의 죽음을 애도했던 대구 사람들의 또 다른 사연도 있었다. 전북 고창 출신 박도경 의병장이 1909년 12월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1910년 2월 8일 자결 순국했다. 그의 의로운 죽음에 대구 아전들은 돈을 모아 초상을 치렀다. 마침 약령시 상인들도 수백 냥을 보태 반장을 도왔다. 또 영남인들은 제전(祭奠)을 올렸고 박 의병장 어머니는 사양했다. 이런 국가 자료를 봤던 필자는 영호남 역사 자산 공유 활용과 교류를 바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안·박 두 의병장의 유족이 100년 전 고향과 대구를 오가는 데는 10일이 넘게 걸렸겠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광주(빛고을)~대구(달구벌)를 잇는 고속도로(2시간 30분)가 뚫린 지 40년(1984년 개통)이 됐다. 두 지역을 오가는 달빛철도사업도 이뤄지면 시간은 1시간 정도로 좁아진다. 지리상 거리감이 줄면 심리적 거리감 단축도 필요하다. 심리적 벽을 허물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역사 속 영호남 역사 자산과 연대(連帶) 활동의 현대적 해석과 활용이다.

이런 노력의 하나가 지난해 6월 10일 광주에서 광복회 광주시지부가 주최한 '영호남 항일독립운동연대성과 기념사업 방안 학술대회'를 들 수 있다. 올해 8월 15일 광복절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와 대구 중구청이 마련한 특별 세미나 '역사 속에 새겨진 영호남 연대를 아시나요?' 주제의 학술행사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런 일은 현재 진행 중인 영호남 달빛동맹의 한 축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이 같은 학술행사는 영호남 행정 당국과 학계, 관련 기관·단체가 관심을 가지면 문화자산으로 삼을 수도 있다. 내년에도 두 지역에서 따로, 또는 함께 이런 행사를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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