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청년 '나'와 예은은 코로나19 영향으로 아르바이트생 고용 시간을 줄이겠다는 마카롱 카페 사장의 말에 일을 그만둔다. 두 사람은 떨어진 운동화 밑창을 순간접착제로 붙여가며 신어야 할 만큼 생활이 어렵다. 그래서 자영업자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삼각김밥 공장 아르바이트. 이곳에선 일흔의 할머니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한다. 생계를 위해 분투하는 둘. 불안정한 일자리를 지닌 둘의 불안과 애환은 깊기만 하다.
경진은 전업주부다. 경진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안 벤치는 밤이면 가사에서 해방된 여성들의 쉼터가 된다. 하지만 단지 내 주차 공간 부족 문제로 벤치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경진은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녀는 학습지 교사로 일하던 시절 자주 시간을 보냈던 장소를 떠올리고 벤치와 함께 사라질 그간의 추억을 떠올린다. 정해진 공간 없이 자주 자리를 옮겨가며 일하는 이들에게 쉼터는 어떤 의미일까.
차진혜는 작은 IT 회사의 재무팀장이다. 점심값이 크게 오르자 자친혜는 직원들의 식대 인상 요구를 대표에게 전달해야 하는 상황. 차진혜는 방안을 고안한다. 식대를 인상하되 최대한 비용을 아낄 수 있도록 앱을 사용하는 방법을 말이다. 그러자 대표는 한 술 더 뜬다. 아예 직원의 자리도 프로그램을 대체하라는데. 대표의 말에 언젠가는 자신도 껌 종이처럼 가차없이 내던져질 것만 같다.
이곳은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은 여행사. 신입사원 정수지는 2년제 대학 출신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대기 발령과 희망퇴직 명단에서 제외된다. 그러자 동료 직원들의 수근거림이 시작된다. 정수지에게 사적 감정을 지닌 상급자가 있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정수지의 일자리는 그의 노력 여하와는 관계없이 휘청거린다.
공수진은 특성화고 계약직 교사다. 현장실습을 나간 재학생이 산업재해를 당하자 공수진은 교감의 지시대로 학교 입장을 대변해 일을 수습한다. 이 덕분일까. 공수진은 다음해에도 계약을 이어가지만 이내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해 원하는 일을 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라고 쉽게 조언하는 이들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정말 우리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건축사로 일하며 건물의 설계 도면을 그리는 윤소장은 언젠가 자신의 집을 짓는 게 꿈이다. 곧 그는 건설회사 현장소장이 되지만 그가 받아 뜬 건 하자 발생 위험이 큰 설계 도면이다. 설계를 맡은 건축사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윤소장은 결국 도면과 다르게 기초를 세우기로 한다. 건설 현장의 관행과 인간의 내적 갈등. 이 상황은 핍진하게 다가온다.
나와 예은, 차진혜, 정수지, 공수진, 윤소장. 모두 가상의 인물이다. 한국사회의 노동 현장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문학이 더 많이 창작돼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한 작가들의 모임,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첫 앤솔러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월급사실주의 2023' 속에 나오는 인물들 말이다.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을 거치며 우리 노동시장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거대한 물결 속 사람들은 자신의 '밥벌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번 앤솔러지에서는 이 같은 개인의 고군분투를 담았다.
농원에서 일하는 고등학생 현장실습생부터 삼각김밥 공장에서 일하는 노인과 여성까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거창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벅차도록 힘든 순간은 자꾸만 찾아온다. 부당한 취급을 받지만 속으로 삭일 때가 많고 내면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앤솔러지에 참여한 11명의 소설가들은 노동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슬픔과 갈등, 관행과 악습 등 11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작품들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눈으로 노동 현장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남기려는 시도로 다가온다. 문학의 쓸모와 힘을 이렇게 발휘해보는 것이다. 376쪽,1만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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