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비겁한 타조’ 대한축구협회

채정민 문화체육부 차장
채정민 문화체육부 차장

'타조 효과' 또는 '타조 머리 박기'. 타조가 천적을 만났을 때 도망가지 않고 고개를 땅에 박아 자신의 눈을 가린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자신이 안 보이니 상대도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잘못된 상식이라는데 이 말은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타조 같은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정부뿐 아니라 한국 축구의 구심점이라 할 대한축구협회가 하는 꼴도 꼭 그렇다. 잘못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를 모른 척하고 시간이 가면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

​최근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사태로 나라 전체가 시끄러웠다. 지난해 국회에서 준비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음에도 여성가족부 장관은 문제없다고 큰소리쳤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시설과 운영 모두 엉망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잼버리 대회장을 이탈했다. 이 정도면 참사다.

그러고도 정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K-팝 콘서트'로 뒷마무리는 잘했다고, '정신 승리'다. 대회에 참가한 각국 청소년들이 큰 기대를 걸었던 행사로 잘못이 모두 덮어질 줄 아는 모양이다. 타조처럼 이미 저지른 잘못은 외면하는 꼴이다.

잼버리 참사의 불똥은 축구계와 축구 팬들에게까지 튀었다. 정부가 갑자기 전주월드컵경기장을 K-팝 콘서트 장소로 쓰겠다고 하는 바람에 FA컵 4강전이 연기됐다. FA컵 주관 기관인 대한축구협회와 경기를 앞둔 전북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의견 조율은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인천은 교통비, 숙박비 등 원정 경기 운영 비용을 허공에 날렸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일정이 또 변경됐다. 이번엔 K-팝 콘서트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FA컵 4강전은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천 선수단은 이미 손실을 떠안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경기를 앞두고 안방을 내주게 된 FC서울도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결국 손상된 잔디 위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축구협회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일방통행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건 문제가 있다' '각 구단, 팬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 등을 정부에 제대로 따지지도 못했다. 졸속 행정을 남발한 정부 못지않게 비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다. 대한축구협회는 축구계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운영하는 현대산업개발이 부실 공사 논란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으니 정부에 잘 보여야 했던 건가 싶다. 약자인 K리그 구단들에겐 고압적이고 강자인 정부엔 꼬리를 내린다.

이미 대한축구협회는 안팎에서 무능하다는 얘기를 들은 지 오래다. 정 회장은 FIFA의 최고 집행 기구인 FIFA 평의회 위원 선거에서 동남아시아 후보들에게도 밀려 떨어졌다. 지난 3월엔 승부조작범을 사면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번복해야 했다. 그래도 최종 결정권자인 정 회장은 제 자리를 지켰고, 이사진이 대거 퇴진했다.

능력은 모자라는데 문제는 수시로 터진다. 최근 위르겐 클린스만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에게 끌려다니는 모양새도 꼴불견이다. 클린스만 감독은 국내보다 해외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 '재택 근무'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도 대한축구협회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서울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지방 언론의 출입 등록을 거부하는 강단(?)이 평소 일 처리 때도 발휘되길 바라는 건 무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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